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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5년 3월
평점 :
오래 전 유럽의 납작하게 내려앉은 무거운 겨울을 여러 해 살았다.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의 체코에서 삶은 두꺼운 회색빛이었다. 독극물을 삼키고 떠난 외과 의사, 추방당하고 거부당한 세월은 서늘하고 건조한 정보로 남았는데, 정지돈 작가는 기어이 피를 돌게 만들었다. 그 노고가 뜨거워서 잊을 수 없었다.
기대와 희망이 소멸한 서러운 기분을 들 때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계속 삼킨다. 무례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소연이나 하고 있을 때도 지면과 시간과 삶을 내어주시는, 가려지고 지워지고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오명을 뒤집어쓴 이들을 살려내고 실체적 진실을 기록해내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면보다 더 긴 추적을 따라가며 자꾸 명치가 조이고 속이 긁힌 듯 쓰라렸다. 무심하게 잡초를 뽑아 던지듯 사람을 어디에도 발 딛지 못하게 하고 모함하고 죽이고 버리고 지워버린 역사를 대면했다. 그러는 동안 제 이익들을 살뜰하게 챙긴 이들은 권력과 이익에 취했으니 죄책감 따위 잠시라도 있었을 리 없다.
마타하리라니! 1903년 하와이에서 출생한 첫 번째 한국 아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현순의 딸, 1919년 3.1운동 이후 연락 임무를 맡은 독립운동가, 조선총독부 관리가 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출산한 여성, 노동조합운동과 미국공산당 활동을 이어가며 이상주의자들의 열정과 시대정신을 공유한 동지, 미군단 민간통신검열단 부책임자, 재미조선인 민주전선 활동가였다. 그런 그가 존재할거라 믿었던 모국, 북한에서 1956년 처형당한 근거는 30여 년 전 사진이었다.
후대를 사는 나는 현대과학의 지식으로 우주의 실체와 세상만사를 배운 듯 굴기도 한다. 그래도 새해인데 기분도 기운도 안 난다고 견딜만한 일상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이 속쓰림은 복잡하고 뜨거운 감정 반응의 실체적 현상이다. 부끄러움과 수치심, 행동의 길을 찾지 못한 분노와 혼란, 조금씩 옮겨 온 몰랐던 현앨리스‘들’의 상흔.
휘몰아치는 시대를 피하지 않고 거센 흐름에 휘말렸다 해도, ‘나다움’의 무엇도 잃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람 속에서도 눈을 뜨고 끝까지 걸어 나갔던, 속고 희롱당해도 항복한 적이 없는 분들이 있다. 이익 외에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원하지 않는 한줌의 권력은 차곡차곡 만든 길을 한순간에 뭉개버리는 환영을 전시하지만 그런 권력이 오래 이기는 결말은 없다.
뭐라 평할 수 없이 귀한 이 연구 결과를 더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셨으면 한다. 짧은 글로 이 책이 복원한 역사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과 미디어의 창작예술가들이 수많은 현앨리스들을 다시 살려내셨단 소식을 고대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증언이 필요하고, 나는 이야기와 기록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