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할 것인가... 사뭇 비장한 이 질문의 실체는 사실 시시한 고민이었다. 출장을 갈 것인가, 여행을 갈 것인가. 10월에 잡을 수 있었던 일정을 양보(?)한 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비행으로 인한 불편함과 죄책감을 가늠하며 연말을 맞는다.

 

이 책은... 어느 날 기내식을 먹으며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미련을 떨며 모셔두고 읽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야 책을 펼치고 남은 욕망을 털어낸다. 올 해는 이렇게 겨우겨우 비행 탄소 배출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알고도... 살다보니 비행을 많이 했다. 직항으로 12시간 이상 가는 곳들을 주로 다녔으니 남은 평생 채식만 해도 배출량을 다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기내식이라곤 없다. 그나마 낫다는 대한항공의 비빔밥도... 고추장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간 투덜거리기를 잘 하는 나는 정은 작가의 너무 하시네 싶은 기내식에 대한 문장들이 미칠 정도로 좋다. 이 문단, 저 문단을 다 외울 기세로 꼭꼭 씹으며 데굴데굴 구를 듯 웃으며 희열을 느끼며 읽고 또 읽었다.

 

기내식은 기내식 먹는 기분으로 먹는다. (...) 이게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그 맛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누적된 위장의 불편함과 관절의 통증으로 곧 머릿속이 가득 찬다. 땅 위에 두고 온 자잘한 고민들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이 망각 서비스야말로 비행기가 제공하는 최상의 서비스다.”

 

여러 해 전 12, 텅 빈 기내에서 세 자리를 차지하고 이리저리 누워 책을 읽다가 상당한 난기류를 만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놀라는 것도 무용해서 그저 있었는데, 누가 다가와서 팔을 꽉 잡았다. 모르는 분이었다. 옆 자리에 털썩 앉아 머리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 무엇을 욕망하는 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준다.”


한 팔은 잡히고 다른 팔은 책을 들고 있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위 짐에 뭐가 들었나, 비상착륙을 하게 되면 도움이 될 것들인가, 읽고 있던 책도 챙길 것인가, 이 분의 이름을 지금 알아둬야 할까, 진짜 비상상황이 오면 팔을 놓아줄 것인가... 생각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들은 무게가 없지만 걱정과 분노는 확실히 무겁다. 그 무게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소중히 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걱정과 고민들을 물건처럼 하나씩 내가 버리면서 걸어간다.”

 

나도 가 본 곳, 그리운 풍경, 나는 가지 않은 곳, 가지 않을 곳... 현실의 공항과 비행기 대신 이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길 잘 했다. 아니 실은 지금도 떠나고 싶다. 대체가 불가한 경험이니까. 일상에서 나를 떼어내어 불안과 불확실성의 세계로 데려가는 일. 그 설렘과 홀가분함.

 

여행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정확한 내가 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이 실행하려면 복잡하고 힘들 여정들을 이 작은 책에 가득 담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띈 무엇도 소재 삼아 현실의 면적보다 더 넓은 세계를 깊이 들려준다. 문장들이, 아니 사유가, 눈앞의 암막을 가차 없이 가르듯 벼려있다.

 

사진이 우리에게 하는 거짓말. 그 속에는 진짜 진실이 일 퍼센트쯤 들어 있고 가끔 그 일 퍼센트의 진실이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여행기, 에세이, 사진작품집...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아닌 것도 같다. 2022년에 생긴, 버리지 못한, 달갑지 않은 모든 형태의 유산을 꽤 많이 떠나보낸 책 여행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2-12-30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떠나고 싶어 미치겠어요.
코로나만 아녔으면 친구들이랑 꽤 갔을텐데... 이상하게 그렇게 어그러지고나니 뭔가 동력을 잃은듯 기운이 빠졌어요.

poiesis 2022-12-30 23:2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팬데믹을 살고 나니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습관이 든 것처럼 이전에 것들이 새롭게 힘이 듭니다. 주저 앉은 기분... 뭔가 새해를 맞으시면 기운 나는 계기를 만나시길 힘껏 응원합니다. 무탈하고 강건하게 겨울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