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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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종류는 짐작보다 많다. 중도 장애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누구도 장애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지도 무관하지도 않다. 이런 엄연한 현실을 나는 장애를 가진 내 가족이 생기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이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가능하면 모르도록 장애인을 격리시키고 대체로 방치해두고 가족에게 떠맡기는 사회이다.

 

울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도 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울고 또 운다. 두려움 때문이다. 더 나이가 들고 엄마의 도움마저 받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2006년부터 장애 가족과 함께 살며 조금 배우고 조금 이해한 다른 세계가 생겼다. 2011년 난간이 없는 다리에서 추락해서 장애를 가진 삶으로 느닷없이 도착해버린 저자의 이야기를 힘을 다해 마음을 다해 읽어 보았다. 공감을 못 할까 두려웠고 공감을 잘 하게 될까 두려웠다. 눈물보다 무서운 심장도 손도 떨리는 억울하고 힘겨운 기억들이 끼어든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장애를 가진 가족을 대하는 반응은 제각각이고 가차 없는 경우도 많다. 아무 때나 와서 볼 때마다 자기 아들 인생 망쳤다고 손주를 욕하고 폭행하는 시부모를 둔 보호자는 결국 목숨을 끊었다. 여러 해 함께 치료를 받던 분들 중에 갖가지 이유로 생을 끝낸 이들이 한 두 분이 아니다. 일상의 비하와 모욕은 무방비한 어느 날이라도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아유, 장애인이 무슨 화장을 그렇게 곱게 했어요?” “점심시간이라서 점심 먹으러 갔는데 점심시간에는 받아줄 수가 없다니, 그게 말인지 똥인지.” “아니, 몸도 성치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담배를 피우면 쓰나!” “아픈 사람들이 술이나 퍼마시고 말이야. 그러면 되겠어? 보기도 안 좋잖아, 보기도.” “병신 같은 년이 재수없게 쳐다보고 지랄이야!”

 

이동수단 좀 같이 타고 다니자고, 인도도 좀 같이 쓰자고, 화재가 난 집에서 혼자 죽기 싫다고, 나이든 부모와 형제자매가 삶을 희생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활동보조를 지원해달라고, 장애인들이 수십 년째 권리 투쟁을 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왜 정치적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정치가 삶의 모든 면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닌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까지 상식보다 기적에 기댄 채 살아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 사람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지, 세상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병원이 모자라서 전국의 병원에 대기를 걸어두고 전전하며 살다보면 병원을 늘리는 정책요구보다 중요한 건 없다. 비급여가 붙은 검사와 진료, 치료만 가능한 상황이면 역시 정치를 통해 의료보험을 확대해 달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준비가 없이도 장애인과 돌봄 가족들은 마주한 현실에서 매일 정치적 상황에 놓인다.

 

집으로 돌아온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 이상 내 의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나는 이미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기록이 불행과 비극과 투병과 극복의 경험담 이상일 것이라는 걸 읽기 전에도 아프게 짐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약자와 소수자란 사회의 낙인과도 같다. 안전망이 촘촘하지 않고 차별과 혐오를 예방하는 교육이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하는 경험을 피할 도리가 없다.

 

아파서, 장애가 있어서 약한 몸을 대하는 사회와 그 사회를 닮게 사회화된 사람들에 대한 사유를 만날 기대가 컸다. 온갖 감정과 열기로 뒤범벅이 되어 미처 정리하지도 해소하지도 못한 내 경험이 차고 맑은 작가의 문장들로 다듬어져 다시 내 경험과 사유로 변화하길 고대했다. 또한 내가 모르는 저자의 장애와 삶을 경험하고 상상해보길 바랐다.

 

나는 내가 성공이나 극복의 길을 걸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좌절했고 매번 주저앉았다. 세상을 원망했고 하늘에 분노했으며 끊임없이 징징거렸다. 소설은 그렇게 쓰였다.”

 

인간에게 난 깊은 상처가 그릇에 난 금처럼 메워지고 그 틈사이로 이전에는 생각 못했던 타인들의 삶의 풍경과 마음의 자리를 위한 공간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내 일이 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장애를 가진 삶을 사는 이들이 내게 가족이고 이웃이 된 것처럼. 무지와 방조로 오늘도 살고 있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테두리를 넓혀보고 싶다는 건 늘 진심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껏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끔찍한 사고 영상은 소거되었다.”

 

이렇게 슬픈 채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고 믿고 싶고, ‘우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르고 결국엔 이해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부대끼고 견디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 절대 아니라고. 저자가 다시 길이 보일 때까지 질기게 버틴시간이, 나와 우리가 끈질기게 버티고 살아남겠다는, 살아가겠다는 모든 선택이 내 정체성도 만들고 사회의 정체성도 만든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다 건너지 못한 그 다리는 다시 건너면 된다. 봄이 아니라면 여름, 가을, 겨울 언제라도. 중요한 것은 그 다리의 폭이 어떤 휠체어도 지나갈 수 있도록 넉넉하고, 다리에 도착할 때까지 바퀴가 걸리는 턱이 없는 길이 이어지도록, 그리고 아무도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놀러간 게 잘못이 아니다. 떨어진 게 잘못이 아니다.


 

턱을 넘는 법을 배우는 대신, 함께 넘는 대신, 턱을 없애면 된다.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장애인 특혜도 예산낭비도 아니다. 길도 건물도 노약자, 어린이,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들면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다.


 

춥고 어두운 겨울을 무탈하게 잘 지내시길 바란다. 2023년의 봄에 다시 집밖으로 나와 새로 돋는 잎도 봄꽃도 햇살도 만나시길 바란다. 우리 모두의 다시 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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