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거리 1.435미터
김만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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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미터는 저자가 35년간 달리던 철길의 간격(궤간)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거리가 되었을까요. 사람 사이의 간격도 이만큼은 필요하다는 경험과 지혜일까요. 어른이 양 팔을 펼치면 이보다 넓을 듯합니다. 밀착은 아니지만 여전히 품 안의 거리 같습니다.

 

기차를 타면 책 읽지 말고 창밖을 보라고 당부하던 친구 생각이 납니다. 그 말이 생각날 때마다 창밖을 보았지만 유럽에서는 황량함에 지쳤고, 한국에서는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가로막힌 풍경에 지칩니다.

 

철길에도 민들레는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저는 본 적이 없지만, 민들레 씨앗처럼 언어의 씨앗들을 받아 글을 쓰셨다니 포근하고 환한 글이겠지요. 자연, 철길, 이웃, 하늘, 바람, 풀벌레... 35년 동안 풍경들이 사라지기도 더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채마밭을 일군 지도 올래로 열여섯 해가 지나간다. 채마밭은 하늘, 우레, 바람, 풀벌레들의 조율로 쓰여진 아홉 행간 초록시편들이다. 삶의 날씨가 건조해지거나 마음의 결이 곤두설 때면 나는 이 채마밭을 찾는다.”

 

46편을 발표하신 글쟁이시네요. 반복 구간처럼 보이지만 어김없이 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는 기관사의 일처럼, 글도 꾸준하게 성실하게 쓰셨을 것입니다. 길 위를 달리며 다듬은 사색이 철로처럼 튼튼합니다.

 

소낙비증후군일까. 오늘도 나는 길을 잃었다. (...) 사는 동안 비 오는 날이 많았다. 상처를 상처로 키우며 모로 누운 날도 많았다.”

 

철로 위에서는 사유하고, 밖에서는 저자 역시 다양한 관계 안에서 풍파를 겪기도 합니다. 때론 가족과 가까운 이들의 삶의 일부로서 함께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과거란 늘 일정한 그리움입니다. 멈추지도 잡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 안타깝지요.

 

여전히 돌은 말이 없는데 단단하게 결속된 돌의 심층 속으로 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스쳐간다. (...) 미처 털어내지 못한 삶의 예각들이 아까부터 명치끝을 뭉긋이 짓누른다.”

 

수필은 일기와는 다르지만, 기억을 위한 기록임에는 분명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기에 가장 근접한 방식의 문학입니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고 나면 저자와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각의 장소에서 시대를 함께 살아간 분들의 역사서처럼도 읽힙니다.

 

좋은 시절은 여전히 미래진행형이다. 물컹한 만남은 언제나 희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막혔던 눈물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고 통일은 여전히 공허한 수사로만 덧칠되고 있다. 불통不通의 세월이 수수방관하는 사이 복사꽃 붉던 뺨, 기다림도 이산의 한도 꽃잎처럼 시들어갔다.”

 

8년간 노동운동을 하신 분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아파하실까요. 귀를 의심하게 하는 북핵 운운에 귀는 못 닫고 눈을 감았습니다. 귀족 노동자란 불화 자체인 단어는 누가 사용하기 시작했을까요. 3시간 자고 일하는 귀족은 동서고금 대한민국에만 사나 봅니다.

 

대용량의 뇌를 가졌지만 한없이 약한 생명체, 그것이 인간이 가진 숙명이자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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