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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사는 이유
김승수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10월
평점 :
기억이 엉망이라서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근래에 허무하고 서글픈 글을 읽었다. 실험 자료 분석이라 그럴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 내가 발작처럼 묻고 싶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불편한 건 불편한 거고,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리는 당장 부인해도 밤에 잠들기 전에 슬그머니 수긍될 거라고 믿었다. 때론 그래서 힘을 내어 끝까지 지적을 하기도 했고, 그런 힘든 일은 내게 해주는 이들을 좋아하고 감사했다.
어릴 적엔 사해동포의식 같은 게 있어서 모두를 같은 에너지로 대하려고 했지만, 미미한 체력은 그런 안배를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좋아하고 소중한 이들에게 집중하고, 싫은 이들에게 애를 써서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래서 될 일도 아니고 지치기만 한다.
내가 읽은 그 자료 분석에는 예를 들어서, “생물 다양성이 80% 감소했습니다.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빠른 대책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꿈쩍도 안 하고, “19%까지 줄어든 생물다양성이 1% 가량 증가했습니다. 증가율을 높이기 위해 참여해주십시오.”라고 하면 좀 더 많은 이들이 설득된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조삼모사가 인간우화 같지만, 뭐든 효과가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한편 그렇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가, 가면(탈, persona, mask)가 필요한 인간, 왜곡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 위악이 망치는 삶, 존재하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오래 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
죽음의 공포를 나누려고 구명 재킷의 끈을 서로 묶은 채
아무런 말이 없네
(...)
이 연둣빛 봄은 어이없이 슬프게
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벗지 않으면 누군가가 벗기는 것이 맞을까. 탈이 벗겨졌다고 삶이 달라질까. 뒤쪽을 볼 줄 아는 시선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모두가 혹은 충분히 많은 이들이 정면을 함께 응시하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은 여전히 유의미할까.
(...)
사탕수수를 조금 먹다가 그만 덫에 걸려
손자놈 코가 반쯤 잘려 나가 버렸어요
잘린 코를 상아 위에 걸쳐 놓고 살다가 죽었죠
(...)
시인은 생활인으로서 중심을 잘 잡고 글도 쓰고 사유도 깊어 가는데, 어둡고 가려진 것들을 보는 목적은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과의 변증법적 변환을 위한 것이라는데, 나는 또다시 마주한 삶의 부조리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
내 봄날의 슬픔이 식탁에 차려져 있으면
그는 접시째 먹어
비로소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이 된다
이것이 그와 사는 유일한 이유다
시란 한없이 직설적일 수도 있는 무기이다.
마을에 달랑 나 혼자 산다
남편은 시든 지 반백 년
(...)
저절로 피어난 망초와 여름을 지내고
긴 겨울밤에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젊은 남편을 그렸다가 지운다
(...)
나 죽으면
마을은 텅텅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