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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웅 안중근 -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다
전우용 지음 / 한길사 / 2022년 1월
평점 :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로 이어지던 학창시절 교과서엔 한국 근현대사가 도려낸 듯 부재했다. 부재와 부족을 채우고 싶었던 우리들은 고등학생이 읽기엔 분량이 적지 않았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전공을 한 이도 없고, 소위 먹고 사는 일이 바빠서 맥락과 내용은 오래 전에 흐려졌다. 독자가 기억하지 않고 사회가 기념하지 않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던 듯 잊혔다. 2019년 어느 날 부모님께서 드라마를 보시다 전화를 걸어 물으시기 전까지 거의 다 잊고 살았다.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이름과 사건 조합 이상의 안중근을 만날 책들을 찾았다. 만나고 싶은 대상이 인간 안중근인지, 역사적 인물 안중근인지, 업적과 저술이 더 궁금한지 불명한 채로 손에 닿는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온전히 집중하고 몰두할 수 없어 지식도 단편적이었다.
그리고 2022년 1월 1일 날짜도 의미심장하게 존경하는 역사학자 전우용님께서 <민족의 영웅 안중근>을 한길사에서 출간하셨다. 역사는 기록이 아닌 현재진행 중인 공통의 경험이라는 말씀처럼 오래 전의 안중근이 청년 사상가로 행동가로 되살아났다.
“역사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 행위와 생각의 연속과 단절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죽음으로써 현실 세계와 단절되었으나, 그의 행위와 생각은 그 자신의 기록과 그에 관한 기록들에 의해 역사적 연속성을 얻었다.”
그는 31세였고 이제 나는 그 나이가 너무 아프고 아까운 반백 살이 되었다. 기억하는 31세의 나는 간신히 세운 중심을 놓치고도 타협할 수 있어 그저 살았다.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는 내 일상의 번다한 고민들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결단이 더 가까웠을까 짐작해 보았다.
책을 읽다 보니 엄중한 시절에도 자신의 사상을 꼿꼿하게 세운 안중근이 기록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다. 폭력의 한 가운데서 평화를 상상하고 구현하려 했던 참 큰 사람이었다. 간혹 누군가의 지성은 현실보다 크고 힘이 세다.
자서전 - 안응칠역사 - 에 ‘역사’라는 제목을 붙인 이다.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민족 내부의 배신과 이견들이 분분한 혼란의 시간에도, 흔들림 없이, 내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집중해서 할 일을 해낸 이다. 그의 길이 선명하고 곧아서 눈이 부시다.
순전히 운이 좋아 크게 피해를 입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적도 없으면서 나는 무척 깜냥이 작다. 나이에 비례하는 바람직한 것들도 적어서, 오히려 작은 일에 더 크게 분노하고, 행동보다 생각만 많다. 안중근이 구속된 후 일본인 판사와 나눈 대화 기록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청취서> 동양평화체제 - <동양평화론> - 에서 그의 기록은 제목처럼 올곧게 평화를 말한다. 증오도 분노도 억울함도 아쉬움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정의와 인도(仁道)를 기반으로 삼는 빛나는 평화 체제를 구상한다. 그가 믿었던 주체는 영웅도 구세주도 정치 지도자도 아닌 각국 인민들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민은 ‘정부에 대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는 한편 국권을 지킬 의무와 책임도 지는 사람들’ 곧 현대적 의미의 시민이었다. (...) 세계사적 차원에서 이런 논의는 20세기 말에야 본격화했다.”
그의 평화로운 세계에서 모든 국가는 자주독립을 이루었고 대등하게 공존한다. 그가 바라던 평화의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한길사의 역사서를 예전처럼 꽉 붙잡고 그가 구상을 한 시절로 들어 가본다. 20여 년 전 친구들과 내가 있던 풍경도 그 길의 초입에서 잠시 만났다.
대의와 신앙심을 가진 이가 총구를 당기게 만든 참혹한 시절이었다. 간결하고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사상을 품고 멈칫거림 없는 발걸음으로 안중근, 안응칠, 31세의 청년이 묵묵히 앞서 걷는다. 그의 순수함과 열정이 길에 핀 야생화처럼 아름답다.
완성되지 않아서 언제든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삶이다. 큰 슬픔에 침침한 눈이 짓무른 시절이지만, 내가, 우리가, 걷는 이 길이 기록할 역사와 풍경을 고민해야 한다. 너무 단순해지지 말고, 내 편이 아니라 혐오하지 말고, 그의 평화가 우리의 현실이 되도록, 좀 더 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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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와 두 아들 분도, 준생의 빛바랜 사진이 붙어 있는 사진첩. 표지를 비단으로 싼 이 사진첩은 안 의사가 옥중에서 숱하게 꺼내 보며 애장했던 유품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