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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평점 :
누군가(?)를 한 달 동안 이제나 저제나 하면 기다려본 건 처음입니다. 추격은 첫째 날에 이어 둘째, 셋째 날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날이지요. 스포일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자세한 내용을 따라가진 않겠습니다. 두 단상과 소회만 남기겠습니다.
우선 모비 딕이 단지 고래사냥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완역본을 차분히 읽어보고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 이름에서부터 대화까지 - 자신이 보는 시대에 대한 통찰과 예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사상사나 철학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이 문장들을 다 이해하겠구나 싶어 얼핏 이해되는 문장들에 안타까워하면 읽던 순간들이 많습니다. 저자 본인이 경험한 시대에 집중되어 있으니 19세기 시대상과 철학을 공부해보고 재독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인간의 뇌기능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서 인과 관계를 찾고 해법을 찾는 구조로 기능합니다(뇌과학 책들에서 반복 언급). 그런 면에서 제 뇌 역시 모비 딕의 풍경을 제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자주 비춰보았습니다.
캐릭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애초부터 타협할 여지가 없듯이, 어쩌면 우리가 누구를 설득한다거나 합의에 이른다거나 그렇게 인간 사회나 인류 문명을 다른 방향으로 선회시킨다는 것이 참으로 고된 일로 느껴집니다.
완독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에이해브 선장과 스타벅과 선원들이 함께 한 포경선 역시 어떤 문명을 상징하고 항해 계획대로 혹은 선장의 고집대로 어떤 결말을 맞게 됩니다. 스타벅이 아무리 여러 번 소리 높여 우리는 다른 항해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말이 결정권자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좌절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유리한 입장이니까요. 모비 딕을 읽고 타석으로 삼으면 됩니다. 세상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든’ 것이지요. 인간이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후우울증이란 표현이 있지요. 유엔 사무총장이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후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저는 심하게 우울증을 겪습니다. 대멸종은 이미 시작되었고 기후위기도 비상도 아니니 기후대학살이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 집 십 대들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하나요. 세상을 망친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인류 문명에도 스타벅처럼 ‘이제라도 생각을 바꾸면 다른 항해를 할 수 있다’고 얘기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듣지 않았지요.
“그것은 마치 실체 없는 신기루 같았다.” 135장 689쪽
에이해브처럼 성취와 소유를 향해 돌진하던 제 세대와 달리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은 공유와 연대와 평화의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고 응원합니다. 모두들 겨울을 무탈하고 강건하고 즐겁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