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은 자 곁의 산 자들 -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에게 배운 생의 의미
헤일리 캠벨 지음, 서미나 옮김 / 시공사 / 2022년 10월
평점 :
“어떻게 이런 일이...”
상가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문상(問喪)’이나 ‘조문(弔問)’에 ‘물을 문(問)’자가 있는 것은,
죽음의 진상에 대한 의문과 애도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전우용 사학자 @histopian
.
.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읽으며 다시 복기한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애도도, 문상도, 헌화도, 추모도... 살아남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 망가지지 않게 도우려는 안간힘이다. 그걸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번에도 추악하게 돈 얘기 - 위로금 - 를 꺼낸다.
말도 글도 무용한 참상 앞에서 조용히 귀를 막고 일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책을 붙잡고 읽는다. 추모를 통해 나는 아직 세상에 남아 살아갈 것이다. 잊지 않고 책임을 끝까지 묻는 일에 함께 할 것이다. 뜨겁지 않아도 확실하게 베는 칼처럼 원인을 찾고 추궁을 벼릴 것이다.
.
.
가족과 친지, 친구,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20대에는 삶을 주체할 수 없어 쩔쩔 매면서도 가끔 죽음에 관한 책을 읽었다. 삶도 죽음도 숙고할 경험이나 지식은 없었다.
그럼에도 사회운동처럼 시작된 유서쓰기는 이제껏 이어오고 있다. 삶이 더 간소해지고 도전도 모험도 없어지자 매년 새롭게 유서를 쓰는 일이 쉬워졌다. 고칠 게 별로 없다. 삶이 단조로워질수록 수명은 빨리 줄어들고 사라지나 보다.
죽음과 늘 동행하는 줄 모른 채 사느라 바빴던 시간을 지나, 운이 좋게도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만났다. 김완 작가님은 ‘죽음 현장 특수청소부’로 자신을 소개하지만, 늘 다정한 시선으로 삶과 사람에 대해 눈물이 송송한 시를 쓰신다. 출간된 시집이 어딘가 꼭 있을 듯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쯤은 ‘철이 들었다.’ 타인의 죽음, 사회 현상으로서의 죽음을 접하고 나자, 내 죽음도 실체로 이해되었다. 강박이 없지 않아서, 불안이 잦은 성격이라,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해두었다. 장기기증도 연명의료거부도.
“다다음 세대를 잘 보살피고 다음 세대를 훈련하는 마음입니다. 장의사로 일한 경험을 비춰봤을 때 매장하거나 화장하면 거기서 끝입니다. 사회에 기여할 기회도 끝이지요.”
이 책에는 상상을 띄우기가 힘들 정도로 생경한 직업들도 있다. 덕분에 한권의 책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오래 멈춘 이야기는 ‘사산 전문 조산사’였다. 몸속에 키우던 아이가 죽어서 몸 밖으로 나온 경험을 설명할 말이나 글이 있을까.
“죽음을 보는 충격과 슬픔의 충격을 분리해야 해요.”
정말 다행이게도 도움을 줄 분들이 계셔서 나는 작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이를 차마 볼 수 없는 부모를 헤아려서, 아이의 사진과 손발 도장을 보관했다 나중에 찾으면 전해주기도 하고, 생김새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아이를 다 감싸고 발만 보이게 해서 안겨주기도 하고...
“시신을 보는 것은 애도하는 과정의 이정표이자 흔적이다.”


수학여행 가서...
일하다...
주말 축제에 가서...
전쟁도 재난도 아닌
수도 한복판에서
헤어진 지, 통화한 지 몇 시간 후에...
자식을 가족을 친구를 친지를 지인을... 잃은 이들이 또 다시 이렇게...
도무지 이을 말을 못 찾겠다.
모두들 부디... 제발... 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