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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평점 :
<여행 스케치>는 여행 동아리인줄 알고 온 사람들과 스케치 동아리인줄 알고 온 사람들이 함께 만든 음악 밴드라는 인터뷰를 듣고 엄청 웃었다. 90년 대 물리학과 음악밴드 보컬이었던 나는 첫 엠티를 산악 동아리도 기피하는 한겨울 설악산으로 갔다.
가장 짧지만 경사가 가파른 오색코스는 길을 분간할 수 없게 쌓인 눈에 허벅지를 담그며 걸어야 하는 난코스였다. 어둠 속에 대청봉 산장에 도착 했지만, 저체온증에 탈진으로 털썩 기절해서 깨지 못했다면 헬기도 타고 방송도 탈 뻔했다.(잘 자고 일어나 일출도 봄!)
지식도 준비도 부족한 무모한 도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서였을까. 다른 계절의 다른 산들이 만만해 보였다. 한동안 산행 지도에 표시해가며 국내산들을 다녔다. 한번으로 족한 곳도, 여러 번 가고 싶은 곳들도 있었다. 야간 산행은 무서웠고 암벽 등반은 공포였다.
세계의 영봉들은 가본 적 없지만, 누가 언제 물어도 물이 좋다고 하는 나는 왜 그리 오래 여러 산에 다녔을까. 죽으면 태어나고픈 나무가 있으니까, 시선이 변하면 생각도 호흡하니까, 심장이 거세게 뛰고 공기가 폐에 차는 걸 느끼며 정직하게 내딛는 움직임이 기쁘니까.
시대도 성별도 직업도 다른데 겹치는 면면이 많아 읽다가 놀라고 덜컥 겁이 났다. ‘꿈이나 목표랄 게 없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했지만 일상에 염증을 느끼는 삶’은 비슷하나, 나는 삶의 ‘전기(轉機)’를 맞을 것 같지 않다. 제 스스로 결심하고 퇴사하고 이사하는 것 정도가 유일한 선택지이자 가능한 변화일 터(혹은 폭망...).
내 선택은 주인공이 느낀 긴장감과 전율을 일깨워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르는 장소와 경험을 이 정도까지 면밀한 묘사로 눈앞에 바짝 데려다주는 작가의 문장들이 아찔하다. 미국 최고의 문장가의 작품이라는데 영어로 읽었으면 더 대단했으려나!
호감을 가지기 어려운 주인공 - 여러 실패, 탈영병, 바람둥이 등등 - 에도 불구하고 소위 ‘멱살 잡혀 읽’게 되는 강력한 힘이 있다. 본질적인 고독, 집착이 분명한 욕망, 광기에 이른 갈등, 동료의 부상에도 흔들림 없는 섬뜩한 등반의지... 복잡한 맛의 삼키기 질긴 재료이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의 고찰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등반 과정의 면면이 반추하기 괴로울 정도로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의 지난 순간들을 상기시킨다. 사는 일에는 등반보다 더 많고 치명적인 선택과 결정이 필요하다. 시행착오 외에 배울 방법이 없고, 리플레이가 불가능한 삶은 모든 생명체가 짊어진 잔인한 농담 같은 운명이다.
스스로를 의심해봐야 그 행위가 현명한 선택을 보장하진 않는다. 반대로 타이밍을 놓치는 더 나쁜 결과도 가능하다. 엉망이 되더라도 그저 해보고, 엉망이 되면 다시 힘을 내어 계속 살아본다. 그런 게 삶이라는 걸 늦게 알았다. 미안하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무조건 더 현명할 거란 믿음으로 낙관한다.
랜드가 자신의 지독한 열망을 ‘본인조차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진심일 것이다. 내 존재와 행위 외부에 우리가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의미와 가치는 없다. 내가 몰두하는 행위와 시간만이 내 삶의 의미를 구성할 뿐이다. 그것이 이해받지 못할 수직 암벽 등반이라도.
내밀한 접근전처럼 ‘등반’에 시선을 고정하고 끝까지 갈 거란 짐작은 빗나갔다. 흥미로운 심리 변화를 다루는 내용에 이르자, 암벽을 내려와 문명세계로 회귀한 묘한 휴식의 시간인 듯했다. 이토록 강박적인 인물조차 언론과 대중의 관심과 반응에 예측 불가한 날씨처럼 변한다.
거대하고 순수한 암벽을 정면에 마주하고, 속임수도 비법도 없이 몸을 움직여 올라가던 고독한 존재Solo Faces*조차, 인간사회에서 탄생하고 자라고 조건화된 존재인 것이다.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적극 탐하는 모습에 서글픈 공감과 동의를 표한다. * 원제
이해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다. 인간은 정갈하고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모두 다른 다면체들을 한 두 면으로 판단하는 일은 미숙하고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살다 보면 그저 수용하게 된다. 욕망과 감정은 대부분 분석도 해석도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랜드보다 언론과 대중의 반응에 면역력이 더 강한(그렇게 믿고 싶은) 내가 직면한 삶의 당면 과제는 무엇일까. 외면하는 걸 그만 두고 똑바로 쳐다보고 선택하고 결정해야할 최우선과제는 무엇인가. 혹은 그나마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고민이 짙어진다.
내게는 랜드의 리더십이 없다. 믿음을 바칠 리더도 곁에 없다. 랜드가 산에서만큼은 의지가 되는 존재였듯이, 내게도 가장 어려운 삶의 공간에 그런 존재가 있으면 좋겠단 망상을 한다. 답은 전혀 모르겠지만 이 모든 몰입과 추억 속을 헤매는 시간이 다 즐겁다.
여러 해전 인수봉 등반 도중에 앞서 오르던 분이 멈춰 섰다. 공포가 닥쳐서 몸이 얼어붙은 것이다. 그럴 경우, 한쪽의 감정이 확실히 강하면 해결은 쉽다. 포기하고 내려가거나, 극복하고 올라가거나. 문제는 고민하는 경우다. 괴로우니 대부분 울게 된다.
등반하는 이들은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짐작 가능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어서, 누구도 말을 보태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기 전의 모든 말과 행동은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올라가든 내려가든 그에게 충분한 힘이 있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랜드가 오르는 높고 높은 절벽, 쳐다보다 지칠 높이를 오르는 일이, 함께 등반하는 동료를 챙기는 일이,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내야 할 삶처럼 느껴져서 명치 쪽이 무거워졌다. 답답함이 차오르면 깊고 긴 숨을 몰아쉬며 견딜만한 기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등반과 삶은 거듭 교차된다. 부상당한 동료는 병들고 사고를 당한 가족과 지인들로 보이고, 그래도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떻게든 이어가야할 일상으로 느껴진다. 누구라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걸 알기에 두렵지만 감춰야 한다. 한 발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서는.
등반이 벌린 일상과 현실과 거리가 좋은 만큼, 거칠게 숨을 내뿜고 나면 해독이 된 듯 안온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도망가고 싶었던 진절머리 나는 곳이 안전한 장소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머물고 떠나고를 반복하는 일이 삶이자 관계일까.
“실제로 집 안에는 질병이 있었다.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이.”
나는 너무 오래 안전했고 오만했고 어리석었기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약하고 티끌 같은지를 늦게 깨달았다. 의미 없는 휴식도 아닌 멍청한 낭비에 다름 아닌 시간들을 줄일 기회가 더 있었으면 했다.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집중하고 싶은 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남을 해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삼키고 감추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이끄는 곳으로 몸을 움직여 가보기도 했을 것이다.
반백년을 살아도 미물의 깜냥이라 작품 속 인물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이 불처럼 일어난다. 이만한 불길마저 살아 있고 살고 싶다는 욕망인 것 같아 은밀하게 기쁘다. 마스크를 벗으면 다시 등산을 하게 될까.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은 어디? 시절과 가을빛이 표지처럼 위태롭고 찬란하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