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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 - 융 심리학으로 읽는 자기 발견의 여정
모린 머독 지음, 고연수 옮김 / 교양인 / 2022년 9월
평점 :
칼 융의 심리학을 처음 배운 것은 호기심에 신청을 한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의 <The shadows of the Earth>란 수업이었다. 나는 몰랐지만 유명했다는 그는 여성 작가 두 명과 영국에 유학 중이던 학교로 초청되어 특강을 했다.
기초지식이 없어서 일단 개괄적으로 개념과 용어를 많이 받아들였고, 복잡했지만 흥미로웠다. 그때가 22년 전이었는데, 학계에서 이분법을 분석/비판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한참 노력하던 때였다. 이분법과 위계는 수많은 현실의 차별과 문제와 범죄를 양산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덕분에 나는 심리학과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의 책들에서 안내한 신화의 세계에서 한참을 즐겁게 소요했다. 인간은 ‘스토리’를 믿는다는 것, 그러니 사물로 구성된 물적 세계보다 상상한 세계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배웠다.
인간의 문명과 역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여정이었고, 실재란 지금 인간이 만들고 있는 것이 유일하며, 지능이 현실보다 크다Intelligence is larger than reality란 사유도 다소 충격적으로 접했다.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그다지 반박할 근거도 필요도 찾지 못했다.
자산과 노예를 소유하여 여유시간에 스스로를 교육시킬 수 있었던 남성권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스토리를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험이 제한된 여성들은 스토리도 빈약해졌고, 남성들의 갖가지 모험담은 다시 신화로 역사로 재생산되었다.
오랜 세월 분리와 위계는 공고해졌고 여성도 교육을 받게 되었지만, 이미 역사 속에서 배워야할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은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고 그들의 역사이다. 환원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불가피하다. 그만큼 이분법과 위계는 오래된 스토리다.
30년 전에 나는 읽지 못한 책이 기념판으로 출간되어 감사하다. 가을처럼 쓸쓸하고 서늘한 기분으로 때론 발도 심장도 시려오는 감정을 맛보며, 어째서 어원이 다름에도 history대신 herstory라는 명명이 간절했는지 심정을 짐작해보면 읽었다.
여전히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모린 머독이 소개한 ‘여성 영웅의 원형archetypes’을 찾아 배우고 기억하는데 집중했다. 신화, 민담, 동화, 꿈 등을 매개로,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발현된 사례들을 기반으로 추출하였다.
인간은 복잡하고 섬세한 존재이다. 외적 장치들이 안전하고 화려해도 내면/정신을 지지할 혹은 지탱할 의미와 가치를 필요로 한다. 그런 스토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식사를 못한 것처럼 정신이 쪼그라들고 약해지고 병이 든다.
30년 동안 읽히고 거듭 출간되는 이유는 그 필요가 여전하고 이 책이 든든한 가이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반평생을 더 살아 읽어보는 30년 전 통찰이 서글프게도 아주 유용하다. ‘거대담론은 식상한 것’으로 분류되어 사라진 가치 부재의 틈을 채워준 듯하다.
고전이 가진 장점들과 힘을 여전히 느낄 수 있는 책을 통해, 현재를 견디고 미래를 상상하는 격려를 얻는다. 낙관하기 힘든 일들은 많고 현실은 잔혹하지만 무력해지지 말자고. 반드시 바꿀 수 있다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피해와 죽음만이 아니라고.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죄로 생명을 잃은 분은 그저 희생자가 아니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던, 치명상을 입고도 기어이 버튼을 눌러 살인범을 체포할 수 있도록 한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영웅으로 살았던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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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우리를 그렇게 증오하는 거죠?”
“최소 지난 5천 년 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에 각인된 이야기인 거죠. 여성들의 힘이 커질수록 증오도 커지죠.”
“우리가 여신을 인격체로 보건, 여성들 사이에서 또는 각자 내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힘으로 보건, 여신 이미지는 (...) 여성적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 여신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자 우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내면의 남성이 여성의 무의식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내면의 남성은 여성에게 그녀 자신의 감추어진 동기를 탐색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할 것이며,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 목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도록 다그칠 것이다. 물론 이로써 여성은 진짜 자신만의 관점을 발견하는 과업, 힘들고 지루한 그 과업에서 풀려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오만(hubris)의 반대말이 ‘존재감 없음(invisibility)’라고 여기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존재함은 훈련이 필요한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 이 일은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하라고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목소리들을 침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설익은 것은 성장을 멈추고, 변화를 거부하고, 변형을 번복하게 한다. 그저 존재하는 일에는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창조적인 충동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 능력은 내가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한 여성성의 한 측면이다. 나 같은 ‘아버지의 딸’들은 상황이 저절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것이 어렵다.”
“여러분은 그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 구름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이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 독립된 자아가 비어 있는 것이 형상(form)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은 사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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