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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스탠드 ㅣ 꿈꾸는돌 32
추정경 지음 / 돌베개 / 2022년 7월
평점 :
명도를 달리하여 푸르른 심연으로 빠져드는 표지다. 제목과 더불어 이 작품이 불가능하다 싶은 어려운 주제인 ‘이해’를 다룬다는 점을 직설한다. 청소년소설로 분류되어 있어 잘 됐다 싶은 비겁한 마음에 청소년에게 먼저 권했더니, 며칠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침묵을 부른 작품이 궁금해 펼쳐 보니... 쉽지 않다. 일견 VR이라는 기술이 매개가 되는 청소년 문학다운 디지털 해법과 유쾌함을 줄 것도 같았는데 그 반대다. 어떤 계기로 가족의 부양을 포기한 아버지와 늙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책임지고자 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이해’ 중에서도 최고난도가 아닌가 싶다. 이럴 때마다 적성검사에서 늘 이과전문직이 나왔던 나는 차라리 수학문제를 100개쯤 푸는 일로 숨고 싶어진다. 내가 못한다고 남도 못하는 건 아닐 테니, 이들은 서로를, 혹은 한쪽이라도 이해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 뭐라도 관계의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아버지나 아들의 직업을 통해서 저자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시선은 under(beneath)이다. 저변을 보고 VR칩을 직접 몸 안에 삽입하는 행위는 모두 이해를 위한 행위이다. 언어와 비언어로 이해가 어려우니 뇌파 영역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노력이다.
무척 인상적이고, 윤리적 이슈도 빠트리지 않아 청소년들을 위한 과학 가이드라인을 염려하지 않았다. 다만 VR 기술과 인간의 뇌 기능에 대한 나의 지식이 모자라서 세대 간 갈등과 이해를 다루는 참신한 발상이라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어려운 논의라는 느낌이다. 우리 집 청소년의 생각도 꼭 물어보고 싶다.
오래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것 같은데 죽을 때가 다 되었어”하며 활짝 웃으시던 할아버지 얼굴도 생각나고,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나이 들면 다 이해된다고 하던 분들 생각도 난다. 살아 보니 그렇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아요...
그나마 가능한 이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을 전제하는 잠시의 파악일 뿐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양자역학의 방식으로 살아가도 있는 지도 모른다. 100%란 없는 세계에서 때론 이해가 50% 미만이라 난감하고 때론 80%쯤 치솟아서 듯 후련하게.
“인간은 결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기에 그것을 향하다 결국 8부 능선쯤에서 멈춰 진실을 깨닫는다. 인간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에 완주란 없으며, 페이스메이커의 운명이 그러하듯 다만 그 과정을 함께할 수 있을 뿐임을.”
오해와 오독과 오류와 왜곡과 편견과 의도적인 곡해와 거짓이 빼곡한 현실에서, 어두운 심연으로 내려가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태도와 애씀이 귀하고 눈물겹다. 기대한 결과가 아니라도 재빨리 단정하고 포기하기보다는 느린 시도를 하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다.
첨언) 전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원학적으로 under-stand 의 under는 우리가 즉각적으로 생각하는 ‘beneath아래’가 아니다. Old English에서 ‘understandan’은 "stand in the midst of,"라고 추정된다. 즉 "between, among"에 가까운 뜻.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 어느 위치에 서있는 지가 뭐가 중요할까, 흔히 ‘속in the midst’을 모르겠다, 란 표현 속에도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이미 드러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