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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 할머니의 서랍 ㅣ 문지아이들
사이토 린.우키마루 지음, 구라하시 레이 그림, 고향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평점 :
어릴 적 종합과자선물세트는 포장을 뜯기 전의 기대를 번번이 망치곤 했다. 마치 맛없어 안 팔리는 과자들을 넣어 세트로 팔아치우려는 속셈인가 싶게, 내 입맛에 맞는 과자들이 별로 없었다. 내용물이 포장에 못 미치는 종류의 선물.
책 선물은 반대다. 표지가 아무리 멋져도 그 멋짐을 늘 능가하는 내용이 있다. 모든 책은 꽝 없는 10-100배 정도의 행운권 당첨과 같다. 읽지 않은 새 책은 모두 설레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두근거리고 기대가 커지는 책은 그림책이다.
전시회 작품과도 같은 그림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 대책 없이 들뜬다. 지난 달 4단 서랍장이 필요하다고 하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20대의 어느 날, 무릎에 고양이가 잠든 채로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 쬐며 책 읽는 할머니를 본 기억도 난다.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물건들은 사용하다보면 망가지게 마련이라, 지난주에도 오래 좋아한 컵과 이별했다. 예전에 속상하고 울기도 했는데, 이젠 담담하게 이별할 줄 안다. 내게도 선물 받아서 특별한 유리병과 틴케이스와 유리컵과 잔들이 있다. 손편지들도 그림들도 작은 주머니도 티코스터들도...
가장 오래된 것은 드롭스 사탕들이 가득했던 병인데, 무려 30년 동안이나 사탕향이 난다(고 느낀다). 아까워서 일 년에 한번 정도만 열어본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담겨 있다. 새삼스럽지만 사람보다 물건이 더 오래 남는다.
부모님 댁에 가면 돌 때 신었던 신도 있고 첫 한복도 있고 어릴 적 밥그릇도 아직 있다. 버릴 수도 기증할 수도 없는 물건들이다. 불과 몇 십 년 전이지만 그것들이 누군가의 평생이고 추억이니 미니멀리스트 같은 개념은 통할 여지가 없다.
그림책에서 모든 게 과거의 시간들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더 반갑고 기뻤다. 살아 있는 한 매일 새로운 날을 처음 사는 것인데, 나이가 많다고 새로운 모든 것들을 사양하며 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한국의 고령층들이 폐지도 안 줍고, 아픈 데도 그렇게 많지 않고, 가족들이나 사회로부터 차별도 무시도 당하지 않고, 더 즐겁게 편안하게 사시면 좋겠다. 대하소설 하나씩 가진 분들이 얘기를 풀어내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할 수는 없는 걸까.
작아지고 마르고 굽은 몸을 움직이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속도도 크기도 감당이 안 되는 시설들에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책감이 든다. 추억도 가득, 새로운 즐거움으로 웃음도 얼굴 한 가득, 그렇게 사셨으면. 인간도 동물도 물건도, 무엇이건 좀 더 귀하게 존중받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