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 1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990년대에 대학에서 기초과학 물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과학을 전공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작품에 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50-60년대 미국처럼 1990년 대 한국에서도 종종 구경거리가 되는 일이 있었으니까.

 

학생도, 물리학 연구원도, 교수도 여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자연과학대 건물에는 여성화장실도 없었다. 어차피 시집갈 여학생들은 선 볼 때 유리하게 학점이나 잘 주자는 교수도 있었다. 이런 엉킨 사적인 경험과 감정에서 출발했기에 읽는 동안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나는 과학자입니다. 그게 나다운 모습인데요.”

 

그런데! 짐작과 달리 똑똑하고 결단력 있는 주인공이 드라마 주인공처럼 삶을 펼치는 내용 전개에 놀라고 신기했다. 유쾌한 일이고, 덕분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재차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픽션을 논픽션으로 진지하게 읽어도 괜찮은 건지, 잠시 고민했다.

 

1950-60년대 미국, 여성은 인권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60-70년 전이다. 대중문화가 등장하고, 산업 기술과 상품이 일반에 보급되고, 중산층이 출현하고,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풍요사회에 대한 꿈이 현실이 되었지만, 여성의 삶은 같은 속도로 변하지 않았다.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마요. 시스템을 뛰어넘어버려요.”

 

재밌는 소설인데, 가독성이 좋아 술술 읽으면서도 미국 근현대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자꾸 검색을 하게 된다. 덕분에 여러 가지를 새롭게 배울 수 있어 좋다. 새삼스럽지만, 갑갑하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숨 가쁘게 변화해왔단 상반된 느낌을 받았다.

 

내 일상을 잠시 떠나, ‘인권 상황을 짚어본다. 작품 속 미국 여성들은 은행 계좌 개설도 불법, 배심원도 불가, 법 집행도 불가, 아이비리그대학도 군사학교도 입학 불가, 전투 참여도 우주비행사도 불가, 보스턴 마라톤 참가도 불가했다. 피임약도 못 먹고 출산 휴가도 없었다.

 

최근 낙태법 관련 퇴행이 떠올라 이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권리에 대해 더 쓰게 느꼈다. 서사를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 씁쓸하다. 당대의 상황을 감안하고서도 무척 충격적인 일들이 이어진다. 여성 과학자의 갈등과 성취쯤으로 작품을 말랑하게 짐작한 내 문제일 것이다.

 

대학원, 연구소, 학계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연령의 여성들에게 가해지던 성차별과 성폭력이 비참하다, 바로 얼마 전 대학에서 성폭행 후 죽임을 당한 사건이 떠올라 쉬었다 다시 읽어야했다. 변화를 가져올 화학()의 역할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어릴 적 화학은 퍼즐처럼 재미있었다. 전자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물질이 태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화학은 결합과 분해라는 변화를 보는 학문이다. 물질의 원리가 이렇다면, 사람이 만든 것들을 극복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용기가 생긴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손 글씨로 써서 내 눈에 잘 띄게 여기저기 붙여두고도 싶고, 다른 이들에게 행운의 편지처럼 보내고도 싶다. 1960년대 여성 화학자 엘리자베스가 동료 연구자들에게 배척당하고, 재정 지원이 없어 수상 경력도 없고, 연구 논문도 빼앗기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고.

 

노력해본 사람들은 하지 않은 이들보다 어려움을 더 잘 안다. 사유의 전환도 고통스럽고 배움에 따라 사는 일도 수많은 벽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러다 잦은 좌절이 절망이 되면 살던 대로 살게 된다. 그 순간들은 모두 날카로운 통증으로 기억된다.

 

은근히 노골적으로 혹은 더 열렬하게 남의 편이 되어 적이 되어 통념을 강요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늘 슬픈 풍경이다. 당시에도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외부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엘리자베스가 육아 중에 요리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동화처럼 멋진 일이다.

 

요리는 화학입니다. 화학은 생명이지요. 모든 것을 바꾸는 여러분의 능력, 바로 자신을 바꾸는 능력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너무 느긋하게 보았나 싶어 이제와 반성이 되는 <히든 피겨스>가 생각났다. 세상에 맞서는 용기는 어디서 지속력을 얻는 것일까. 꼭 지켜내야 할 내 정체성이란 것은 또 무엇일까. 저자 보니 가머스는 예순 다섯에 데뷔를 했다. 그가 페이지마다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실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주방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곧 삶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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