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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무시무시한terrible 소설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20세기 물리학을 함께 공부한 동기들이 양자역학(자)들을 소재로 한 본 적 없는 문학이 탄생했다고 했다. 살짝 억울한 발작적인 흥미가 솟구쳤다. 누가 읽을 수 있다는 건가.
문학적 불안이 엄습하고 물리학의 체념적 수용이 드러나는 지적인 제목이다. 원제Un verdor terrible는 해마가 손상된 뇌를 깨우는 질문을 불러 일으켰다. 푸르름 그리고/혹은 광기verdor. 세계의 비밀을 밝혀 (희생을 줄이자는 순진한 세계관으로 야기된)멸망의 무기로 오용된 입자 물리학의 뒤틀린 운명이 떠올라 기분이 서늘해졌다.
논픽션소설이란 단어 구성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장르 또한 범상치 않게 도전적이다. 이율배반처럼 느껴지는 매력적인 세계에 입장하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주 영리하게 배치된 색colour들이 눈에 띈다. 색이란 빛, 입자, 에너지, 물리학의 대상이다. 오랜 세월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간은 가시능력 안의 관찰정보만을 모아 원리와 법칙을 찾았다. 다채롭고 감각적인 메시지이다. ‘보인다’고 믿는 관찰세계의 본질을 알 방법이 없으니, 불가지의 영역인 양자역학으로, 제목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다.
“특이점이 맹점이며 기본적으로 불가지라는 사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빛은 특이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특이점을 볼 수 없다. 우리의 정신 또한 특이점을 이해할 수 없다. 특이점에서는 일반상대성 법칙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71
새빨갛게 물든 손톱, 푸르른 밤의 깊은 어둠, 폭력으로 물든 제복,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존과 과오로 온통 얼룩진 뿌옇고 흐릿한 색감, 덮이고 썩어서 무화된 모든 비극을 품고 생명을 키워내는 흙earthy 빛, 알지 못하는 근원적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별빛.
인간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색(빛)을 좇았다. 우주의 디폴트 값이 어둠과 죽음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했으며, 빛과 생명이라는 찰나의 ‘나타남’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사랑했다. 그 열정이 광기가 될 때까지.
두려움과 호기심 중 누가 주동력인지는 모르나, 자력으로 멈출 수 없는 구동 상태로 자신이 발견한 것이 사실인지 비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혹은 바라는 바대로 새로운 현실reality을 만들어내면서 가시 세계를 확장시켰다.
논픽션에 픽션이 빼곡하게 채워질수록 독자인 나의 혼란은 커져 마침내 작품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설득 당하면 학위를 반납해야 될 듯해서 현실 동영상속 물리학자를 만나 숨을 고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P7BHwzcxIIE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위로인지 절망인지 모를 일이나, 이해여부와 관계없이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서로와 무관할 수 없다. 생명의 모든 움직임은 개입을 만들고 매 순간 양자를(세계를) 뒤바꾼다. 만물은 생명의 움직임(개입)에 의해서만 존재와 정체성이 측정되고 설명될 수 있다. 피할 곳 없는 상호작용의 영역에서 인간의 전whole 능력과 감각에 반하며 세계를 설명하는 인간의 암호가 양자역학이다.
“우리 시대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개입이 탐구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과학이 세상에 비추는 빛은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의 모습을 바꿀 뿐 아니라 그 기본적 구성 요소의 행동까지도 바꿉니다.”225
양자(물질, 존재, 세계)는 쉼 없는 관계의 성립과 해체로 명멸하고, 그 존재들이 머무는 공간은 고밀도 액상처럼 도저한 출렁임을 퍼트린다.
이유도 의미도 없이 잠시 존재하며 때론 기적으로 때론 미물로 불리는 나는 이 세상에서 종종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단일 개체로서 유의미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의미의 수명은 얼마나 길 것인가. 행패를 부리며 통곡하고 싶은 버거운 찰나의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본 입자들은 가능태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사물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가능한 것’에서 ‘실재하는 것’으로의 전환은 관찰이나 측정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양자적 실재는 없다.”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