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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 역사왜곡방법론 : 총론(總論)
진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6월
평점 :
역사를 왜곡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을 것이고 실제로 오랜 시간 자행되어 왔을 것이다. 의도와 목적 또한 다양할 것이고,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 삼아 장기간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모아 조선왕조실록처럼 집중 작업하지 않는다면 밝혀질 날은 요원하다.
친구 중에 고려사를 전공하는 이가 있는데,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 곤란해 했다. 자료도 적고 연구자들도 적고 예산도 적고...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했다. 그러다 발굴현장을 다니고 관련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최초의 목표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명칭이 익숙하면 잘 아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공된 일부 정보를 제외하고 우리가 해당 시대에 대해 아는 바는 사실 없다. 특히나 문자가 확립되고 기록이 본격화되기 전이라면, 그나마 남은 물건들을 해석하는 일로 모든 것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삼국 시대에 대해서 기존 학계에서 예산을 들여 연구할 리가 만무하고 저자의 인상적인 이력에서 보듯, 관심이 있는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스스로 모아 해석을 해나가는 방법이 해당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거의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
萬波息笛 만파식적
萬 일 만 만 波 물결 파 息 쉴 식 笛 피리 적
덕분에 만파식적에 대해 처음 자발적으로 찾아보았다. 비유와 해석으로 보자면, ‘만파’란 끊임없는 내환과 외환을 일컫는 것이다. 우환들이 쉬도록 하는 피리란, 한자에서 보듯 죽간에 적은 문서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물증은 없다. 그러나 기물보다는 문서가 더 그럴 듯하다.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있었다는, 동해에 있는 섬에서 자란 신기한 대나무로 만든 피리라는데, 이것을 불면 나라의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니, 외교협약 문서 같기도 하다. 기록된 바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 전해지니, 물증이 흔적도 없는 것이 아쉽다.
협약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이 불에 태웠을 수도 있고, 파기했을 수도 있고, 발설하지 않도록 해서 상세 내용이 있는 문서가 아닌 기물로 바꾸어 기록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적의 군사가 물러가고, 가뭄에 비를 내리고, 병자를 낫게 하고, 파도를 잠재우는 힘.
적의 군사가 물러가는 것 외에는 덧붙여진 내용이 아닐까. 혹은 전쟁이 그치니 다른 것들도 좋아지더라는 이야기일까. 저자는 만파식적을 ‘1,300년 전 동아시아인들의 영원한 평화협약’이라 설명한다.

사실 다 모르는 이야기다. 설명도 주장도 뒷받침할 물증은 없다. 7-8세기 권력 지형도는 한 세대 30년쯤으로 비교적 빠르게 변화했고, 삼국시대는 곧 남북국 시대 - 통일신라와 발해 - 로, 다시 고려시대로 변화한다.
국경선도 국가의 개념도 국제 관계도 협약도 현대의 개념으로 이해하기엔 다른 점이 많을 것이다. 서양의 도시국가들을 이제는 수도로 한정해서 지리적으로 파악하듯이, 한반도의 상황 역시 항구나 포구 중심으로 무척 다양한 교류가 빈번하고 중앙 권력이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들도 많았을 것이다.

상상력이 뛰어나고 끈기 있는 연구자들이 풍족한 예산을 확보하고 이런저런 연구들을 해주었으면 하는 분야는 참 많다. 무기를 만드는 대신 잊힌 삶을 복원하고 스토리를 즐기고 그럼으로써 지금 현재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책을 읽다 커진 내 상상이 만파식적의 설화보다 더 과감한 상상인 듯하다. 어딘가에서 나타나주면, 한반도 말고도 만 가지 근심을 없애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멈추지 못하는 전쟁에 지치고 문명이 권위가 내게서 약화되어 서글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