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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아도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평점 :
마음산책의 책이 아니라면 화가 났을 지도 모를 제목,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목,
반어법처럼 느껴지는 제목...
읽으며 애쓰지 않고 생각을 애써 끄집어 내지 않고
천천히 필사만 해보았다
편안하다
“가끔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고, 가끔은 머릿속이 따끔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돌이켜 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일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오면서 누적되어온 피로였다. 진짜를 가질 자신이 없어서 늘 잃어도 상처 되지 않을 관계를 고르곤 했다. 어차피 실망하게 될 거, 진짜가 아닌 사람에게 실망하고 싶었다.”
“미리는 늘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쳤고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자신의 분노로부터, 불안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도망쳤고 최대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미리는 일에 몰두했다. (...) 일이 좋기도 했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면 공허함을 느꼈고 불안해졌으니까.”
한 작품에 10쪽 정도, 많지 않은 분량에 모든 작품이 다 애쓰는 이야기로 읽힌다. 강렬해서 놀라고 애틋해서 쓰리고... 나중에 다른 기분으로 다시 읽고 싶은 작품도 있다.
복기가 어려워 눈을 감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기억... 애쓰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절, 웃음도 마음도 넘칠 수 있었던 시절... 내가 미화해서 기록한 기억 속에는 늘 날씨가 더없이 좋고 사람들은 사랑스러웠고 세상은 아름답다.
대책 없니 서툴렀지만 중요한건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그런 게 어리고 젊은 특권이었을까. 세월과 더불어 감정은 풍부해지고 섬세해졌는데 전하는 기술도 다양하게 접했는데, 전달하고픈, 공유하고픈 이들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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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작고 연하고 약하면 그에 맞게 줄기도 작고 연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게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그 시기가 지나면 뿌리는 더 자라지 않는 것 같아.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어려워. 늘 뿌리 뽑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미 충분히 가졌으며 더는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불편하게 하지 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예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라는 이들을 본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을 본다. 더 노골적으로, 더 공적인 방식으로 약한 이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인간성의 기준점이 점점 더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많은 것들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힘을 더해야 한다.”
“우리는 겨우 저쪽의 세계를 상상해봐. 생명과 존엄조차도 공평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곳. 당신이 흘리는 눈물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르는 일들이 반동이 되어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그 때문에 그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던 당신을.”
부지런하게 존재들 사이를 휘저어 선을 그어대는 사람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 잘난 것 하나 없이 동물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사람들... 단편 속에서는 오히려 이해할 법하다. 무지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고 나쁜 사람들...
조심하고 살아도 상처가 생기는데, 더 깊고 더 아프게 만드는 이들은 존재한다.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든 현실에서는 지지 않아야 하고 지고 싶지 않다. 잊고 살다 ‘보라’고 기억하라고 만든 작가들 덕분에 깜빡 졸다 깬 기분이다.
가장 오래 남는 관계가 가장 중요한 관계일까... 오래간다는 건 애쓰지 않음일까... 간절하게 애씀 덕분일까. 어쩌면 나는 그저 미련하고 편안한게 싫은 지도 모르겠다. 무난한 것도 싫은 지 모르겠다. 행복이 낯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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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도 마음이 강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인 것 같아.”
“일어나서 살아갈 하루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일어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은 정민의 뺨을 때리며 약 올리듯이 지나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뿐인데. 나란히 앉아서 그네를 탈 수 있는 시간,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빛으로 마음껏 빛날 수 있는 시간, 서로에게 커다란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불안정한 가능성보다는 불행 속에서 익숙해지고 체념하는 편을 선호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나 자신에게 그렇게 설득할 때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고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다른 삶을 추구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렸고, 진짜 삶이라는 것을 살아보기에도 너무 늦어버린 나이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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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Chill Out> David Hock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