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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 비극적인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사회적 기록
산만언니 지음 / 푸른숲 / 2021년 6월
평점 :
잊고 살았다. 숫자와 사건명으로만 남고 다른 것들은 거의 다 휘발되었다. 미안해서... 낱낱이 기억하고 살기에는 참사가 많은 나라라는 변명이 먼저 떠오른다. 다른 일들로도 문득 목이 막히는 통증을 삼키며 불쑥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살아야했다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대학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태어난 지 돌도 되지 않은 아기가 있는 선배가 동생 결혼 선물을 하나 사준다고 아기와 동생과 함께 백화점에 갔다.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책임자 처벌도 못보고 정신을 놓아버리셨다.
세기가 바뀐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은 동생이 결혼할 사람이 삼풍참사 생존자인데 아직 배상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변호사가 판결 전에 결혼을 하게 되면 ‘결혼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상 회복’된 것이라 간주되어 패소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고 했다.
바쁘고 즐거운 20대를 보내며 다 잊고 살다 놀랐다. 아직 끝이 난 게 아니구나. 그런 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서, 가능하면 잊고 싶은 무서운 일이라서, 시선만 돌리면 잊을 수 있는 일이라서. 그래도 그 시절의 내가 지겹다, 끈질기다, 돈밝힌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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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이라는 단어는 묘하다. 돈 많은 이들이 비싼 물건 사러 갔다 죽었다, 는 참사의 원인과 책임과는 별개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참사를 당해도 되는... 사람이란 없다. 그리고 참사의 피해자와 생존자가 모두 돈 많은 고객들인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백화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그날 그곳에 가야만 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대단히 용기 있는 발언인 양 나라 걱정하며 “지겹다”를 연발하는 이들 덕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일을 겪어도 반응은 모두 다르다. 상처도 후유증도 다 다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는 늘 당연한 것들을 잊고 패악을 부리거나 가학적으로 군다.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괴롭히는 게 즐거워서. 어리석고 역겨운 모습을 지겨울 정도로 거듭 보며 산다. 장사가 되니 그런 자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는 언론이 있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행의 정도는 제각기 달라서 고통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어떤 불행이 가장 고통스러운지 묻는다면 아마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해해볼 수 없는 불행이 진짜 불행이라고. (...) 대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일이 어째서 나한테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 불행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하는 사건이 된다.”
세월호... 참사가 확실해지고 사망이 확실해지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다 같이 가만히 저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 보고 있었다고? 언론에서 전하던 속보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왜? 무엇 때문에? 누가 이런 미친 짓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보았다.
핸드폰 영상 속에서 무섭다고 울던 아이, 위로해 주던 친구들...
“사람들이 구하러 올 거야. 울지 마.”
세월호는 그렇게 나의 참사, 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기다리고 있는 줄 몰라서, 구해야 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무 것도 모른 채 시간을 놓쳐 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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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아르바이트 생이던 저자가 생존해서 글을 써 준 것이 미안하고 고맙다. 2014년 10대이던 아이들은... 지금 어떤 20대의 삶을 살고 있는지... 덕분에 미안하게도 간만에 생각해본다. 부디 생존을 자책하지 말기를, 필요하면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때론 애쓰지 않아도 즐거울 일이 있기를.
“불행해봐서, 자다 일어나 벽을 치고 흐느낄 정도로 불행해봐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안다. 전에는 행복에 대해 대단히 착각하고 살았다. 내가 겪은 불행이 너무도 선명해서, 행복도 불행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창문을 깨고 안방으로 들이닥치는 것인 줄만 알았다. (...) 행복은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다치지 않은 상태, (...) 살아오면서 슬프지 않았던 모든 날이 전부 행복한 날들이었다.”
무탈한 일상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절치부심 온갖 치열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내가 사는 집이 무너지지 않고 땅이 꺼지지 않고 물과 전기가 끊기지 않고 식량이 부족하지 않고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아야, 누구도 희생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안전한가... 행복한가...
“불행의 진면목은 고독이다. 내 마음을 누가 알기나 할까 하는 (...) 나는 세월호가 하나도 지겹지 않다. 제대로 밝혀진 게 하나 없는데 대체 무엇이 지겨운가. (...) 이 땅의 모든 사회적 참사가 지겹지 않다. 끝까지 이 일에 대해 물을 것이며 평생 기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