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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1960 - 탄생과 혁명 ㅣ 한국 팝의 고고학
신현준.최지선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5월
평점 :
필사 2부
어릴 적 거실의 한 벽면을 차지한 전축과 턴테이블 판들... 당시에는 관심이 없어 부모님 소장품 목록도 기억하지 못한다. 40년대 생인 부모님께 드문드문 듣던 대중예술인들과 음악다방,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을 소환하며 떠올리며 지난 세월을 실감하며 읽고 기록한다.
- 우리가 비틀스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소음이지 음악이 아니었어요. 너무 시끄러웠죠. (...) 근데 점점 좋아지기 시작해서 하여튼 비틀스 곡은 히트 치면 전부 다 연주했죠.
- 1967년은 대중문화와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해로 기록된다. 이른바 총구에 꽃을 꽂고 평화와 자유를 외친 플라워 무브먼트와 대항문화가 절정을 이룬 시점이기 때문이다.
- 1969년 가수왕을 호명했을 때, 객석은 놀라움과 환호성으로 어지러웠다. 뜻밖에도 데뷔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인인 펄 시스터스가 ‘가수왕’으로 선정된 것이다. (...) 가수가 갖춰야 할 요건은 가창력이 거의 전부이던 시절, 이들은 거기에 처음으로 ‘비디오형’ 미모와 춤을 겸비한 존재였다.
- 서병후는 1960, 70년대 ‘팝 혁명’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 1967년 한국 최초의 팝 음악 매거진 ‘팝스 코리아나’를 창간했으며
- 1970년대 한국의 전체 인구는 약 3천만 명, 라디오 보급대수는 360여만 대, TV보급대수는 50여만 대였다. 하지만 TV 보급대수는 1971년에 80여만 대, 1972년엔 100만대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 1960년대 후반이 라디오의 전성시대였다면, 1970년대 초는 TV가 급부상한 시대였다.
- 소울-사이키라고 뭉뚱그려서 명명된 새로운 대중음악의 조류가 기성 가요계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 소울 가요 태풍의 핵은 단연 신중현이었다.
- 당시에는 음반을 만드는 것은 음악과 관련된 장사 가운데 가장 하질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 1960년대까지는 평론가는 물론 연주인과 가수조차 음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 음반을 발표하는 것은 무대 수입을 올리기 위한, 이른바 몸값을 올리는 방편이었다.
- 크리스마스 이브는 통행금지가 없어서, 장안의 멋쟁이들이 명동 등지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생음악 살롱이나 고고 클럽 등에 거나 밤새 쏘다니며 즐길 수 있는 해방일이었다.
- 모방이든 뭐든 ‘멋모르고 놀고 즐기면서 좋았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달리 말해 청년 문화에 ‘자의식’이 필요한 시점이 오고 있었다.
- 조용호의 경우 포크, 컨트리, 칸초네 등의 감미롭고 예쁜 음악을, 김정호는 피아노에 의존하는 단아하고 스탠더드한 음악을, 이해성은 맑고 격조 있는 포크송이나 샹송을, 이종환의 경우 감상적이고 무드 있는 통기타 음악을 각각 좋아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 한 대수는 1974년 군에서 제대한 뒤에야 음반을 발표하지만 그가 한국에서 자작 포크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 이장희는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로 구어체 가사를 쓰면서 작사의 새로운 지평을, 훅hook이 강한 후렴구를 가진 악곡 형식으로 작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 (...) 그는 그 이전까지의 관습적 록과 관습적 포크를 모두 넘어서는 놀라운 차이성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