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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제철은 지금
섬멍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평점 :
예전엔... 반복을 무척 싫어하고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선생님이란 직업을 존경하면서도 나는 절대 못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은 지나온 환경과 교과서로 돌아가서 매년 반복 강의를 해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참을성도 인내심도 없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싫었다. 영어권에서 살 때는 “이 대화 전에 하지 않았나요?”란 표현이 있어 무척 좋았다. 하지만 새롭고 신기하고 재밌는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어디 있나. 일상과 삶이란 반복의 연속이니 표현하진 않아도 짜증과 화가 많은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두서없는 서두는 사회적 논의 대상이 되는 주제들에 근래 더 많이 지쳤다는 하소연이다. 뭐 좀 해보려 하는데, 뭔가 될까 싶은데 잘못될 것 같은, 다 망가질 것 같은 조바심과 걱정에 두 달 내내 내 속도 다른 이들의 속도 시끄러웠다.
대한민국은 나로선 도대체 왜 이게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만이 아닐까 싶은 별 이상한 간섭이 많고 차별도 심한 나라이다. 법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혼인관계를 공식 문서로 신고한 ‘정상가족’을 제외한 다른 형태의 가족에 대한 사회의 포용력은 거의 부재한다.
법적혼인신고를 한 재혼가정이나 한부모가정 혹은 부모가 아닌 법적보호자와 어린이로 구성된 가족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폭력적이다. 그러니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닌 형태로 만들어진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해 전부터 유럽에서 절반 이상의 비혼 가정이 통계에 잡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더 오해하기 전에 밝히자면 이 책은 사회과학보고서가 아니라 만화다. 요리와 개그가 맛있게 섞여 있고 그림들은 동글둥글 순하다. 제철 식재료를 무척 좋아하고 가능한 제철 음식을 먹으려는 나는 제목이 반갑다. 삶의 고됨이 양념처럼 진하다.
주말에는 가능한 아무 것도 하기 싫으니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반조리식품이나 가공식품, 배달음식이 생각에 들어오려 한다. 그러지 말자고 채소들을 대량 주문해뒀는데도 과자나 먹고 말았으면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다채로운 채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먹방에서 흔히 사용하는 신음소리에 가까운 과장된 표현도 없는데... (혹은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간단 요리/조리들에 끌린다. 당면을 좋아하지 않아 당면 들어간 만두도 안 먹는데 당면 잡채가 하고 싶어진다. 위험한 책이다.
제철 채소들이 잔뜩 있으니 그야말로 ‘잡채’를 해서 당면을 조금 섞어볼까 싶다. 당면 잡채를 만든 적이 언제인가... 기억도 안 난다. 뭔가 설렌다. 주말에 무려 다량의 칼질을 요구하는 요리를 하게 하는 정말 위험한 책이다.
나는 웹툰 작가도 아닌데 왜 마감에 쫓기는 기분으로 사는 걸까 고민해본다. 물론 프로젝트란 늘 계약기간이 있고, 없다 해도 업무란 마감/마무리가 필요한 게 당연하지만. 마침 4월 마지막 날이고 내일이면 5월 1일이다. 노동절이 일요일... 속이 쓰리다. 잡채에 고량주인가.
사는 일이 힘들고 고되고 어렵다고 하면서도 서로 더 힘들게 하는 일들을 아직 고수하는 이유는 뭘까. 서로 조금씩 더 너그럽게 여유 있게 다정하게 봐주며 이야기를 들어가며 살 수 없는 이유는 뭘까. 가치가 아니라 편안을 찾는 내 시선이 지나친 건가... 여러 생각이 든다.
복잡하니 잡채 만들러 간다. 손을 움직이다 보면, 여러 채소들의 향을 느끼다 보면 뭐라도 정리되고 가벼워질 것이다. 모두들 주말 적당히 번거롭고 아주 맛있는 제철음식 드시며 편안하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