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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열흘 간 함께 했던 신화읽기 책모임을 마쳤다.
완독의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크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친구와는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를 같이 해보았다.
혼자서도 꾸준히 신화를 읽고 쓰는 친구라 도움을 받기만 했다.
이 책은 신화 해석에 집중한 책이 아니다.
기록 이전의 구술을 보충해서 비교하고 설명해주는
독특한 철학서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우리는 더 할 말이 많고 편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 시절의
사람들이, 삶이, 생각이 생생하고 기시감이 자주 들었다.
문명과 문화가 전해지는 길을 따라 여행하는 기분도 들었다.
“‘태초’라는 말도 흥미롭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아르케(arkhe)인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이렇게 정의했죠.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뒤로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 그러니까 ‘카오스가 생겨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나?’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
마치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냐고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존재를 전제하고 정의까지 내린 것이 놀랍습니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사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말도 이상합니다. 뭐라도 있어야 ‘상태’라는 말을 쓸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면 ‘상태’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나요?”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졌지만, 헐크나 아수라 백작과는 달리 정면과 뒤통수에 얼굴이 있습니다. 뒤통수의 얼굴은 과거를, 정면의 얼굴은 미래를 응시하는데, 두 얼굴은 역사를 통찰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와 통합니다.”
로마 신화 고유의 신이자, 안과 밖을 향해 두 얼굴을 내미는 ‘문의 신’ 야누스. 로마인들의 신앙과 1월의 유래, 전쟁과 야누스 신의 관계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1월은 무척 춥고 어두웠을 텐데도 중요하게 여긴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한 해의 첫 날, 매월 첫날, 하루를 여는 아침... 모든 시작을 새롭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유기체인 지구 안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을까요?”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망치고 떠나는 일은 분명 큰 잘못입니다. 멈추지 못한 전쟁, 차별, 혐오, 폭력, 환경 파괴, 기후 위기...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편한 것에 더 끌리고 자주 게을러지고 때론 거리낌 없이 낭비하고 사는 삶을 거듭 돌아봅니다.
“그리스어로 ‘프로’는 ‘앞’이라는 뜻이고, ‘메테우스’는 ‘지혜로운 자,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니까, ‘프로메테우스’는 ‘앞을 내다보며 생각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 됩니다.”
신화 속 ‘예지’란 현대의 관찰과 통찰을 합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화나 문학 속 인물들은 종종 ‘예언’을 청하고 들었기 때문에 그 예언대로 삶이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이야기속의 현혹과는 달리, 아주 현명하고 지혜로운 조건을 제우스에게 제시해서, 자신도 살고 세상과 인간도 편안하게 합니다.
무척 부러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온갖 통계와 과학적 사실이 기반이 되고, 진지한 연구자들과 학자들이 말을 하고 글을 써도 듣지 않거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부정하거나, 알아도 충분히 빨리 바꾸려 하지 않지요. 이렇게 보이는 제가 다 틀린 것이길 매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