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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
메리 셸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최초의 어린이판본부터 완역본까지 여러 차례 읽고 영화도 보았다. 번역본은 최신작이 가장 원작에 가까운 것이란 믿음이 있어 이 책이 무척 반가웠다. 여전히 읽기 전엔 매번 떨리고 설렌다.
어릴 적엔 조각난 몸들이 움직이거나 이식된 부분이 모두 다른 괴물로 변하는 꿈도 꾸었다. 지금의 떨림과 설렘은 괴물처럼 추하다고 외면당한 창조물도, 호기심 이외의 다른 미덕은 갖추지 못한 창조자 때문도 아니다.
괴물이란 이미지를 원하는 대로 덧씌워 타인만을 괴물이라 혐오하고, 육신은 강건하나 정신은 이식당한 어지러운 조각으로 채워 사는 인류의 실상을 마주하기가 두렵다. 그런 한편 경고를 복기하고 새롭게 경각시키는 문학적 호통은 좋은 이 이율배반.
“우리는 창작이 무(無)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돈에서 나오는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은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창조물 프랑켄슈타인은 글을 배워 기록을 접한 후에 경멸과 혐오를 배웠다. 평범하고 무구한 모든 존재가 계기를 만나 촉발되는 충격적인 공포는 문학과 영화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의 창조주인 당신마저 나를 혐오하고 부정하다니. 당신과 나는 한쪽이 죽어야만 풀리는 운명의 끈으로 묶여있다. 나를 죽이려 하다니. 감히 생명을 갖고 장난을 치냐? 당신이 나에게 도리를 지킨다면 나도 당신과 인간들에게 도리를 지키겠다. 나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다시는 인간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생명 자체를 창조하겠다는 도전은 성공했으나 기대하던 외모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 실험의 결과물을 증오하는 자는 적반하장의 전형이다. 그 외모조차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일 뿐이니 그 정도 예측을 못 했다는 것은 무슨 어불성설인가.
“막상 완성하고 나니 내가 꿈꾸었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감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창조물은 자신이 청하지 않았으나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반응해야 했나. 인간을 확실하게 좌절시키는 법은 거대한 재난보다는 지속적인 경멸과 혐오이다. 항변도 애원도 협박도 소용없는.
“늘 끝없이 갈망했을 뿐이지. 사랑과 우정을 그토록 원했지만 언제나 거부당했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모든 인간이 나에게 죄를 지었는데 왜 나만 죄인으로 몰려야 하지?”
자신이 꿈꾼 이상이 기괴한 결과물로 귀결했다면 행위 주체자로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반성할 일이다. 비난의 대상을 타인에게 돌리면 그 손에 목이 졸려 던져 진다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200년 전의 문학 풍경 속에 2022년의 현실이 실시간으로 조응한다.
“나를 파멸에 이르게 한 자를 찾아서 죽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나자 목적의식이 고통을 잠재우고 잠시나마 삶을 받아들이게 해주었지요.”
힘든 이유를 바로 찾아낼 수 없는 원인은 많다. 그렇다고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될 때까지 고민하는 대신 가장 저열하고 무지한 행렬에 게으르게 합류한 것은 변명도 이해도 받지 못할 것이다. 혐오와 독설의 토악질이 요란한 봄날이다. 코도 막히고 숨도 막히게 하는 악랄한 알레르겐이다.
다시 필요 없을 줄 알았던 오래 전 질문을 다시 묻는다.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괴물이 아닌 삶은 무엇인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의 괴물은 지금의 괴물과 다른가. 왜 괴물이 되어 살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