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방 보리 만화밥 8
류승희 지음 / 보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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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하나로 뭐 이렇게 여러 깊이를 표현하셨나연필의 움직임이 바람처럼 다양하고 자유롭다고 느꼈다예술가에게 도구란 중요하지만 본질은 아니란...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경탄했다이미 읽은 분량이 아까워서 그림만 다시 보려고 일단 멈추고 다시 보았다.

 

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그 사람과 그 삶을 다 아는 것처럼 표현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연필로 채색된 창문에 비친 흐린 그림자일 뿐인데 심정도 고통도 다 알 것 같기도 했다그 창 안의 공기 무게가 내 호흡에 섞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 겨울의 나보다 얼마나 멀리 지나온 걸까?

계속 똑같은 원을 그리고 있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거라고 착각하는 걸까?

또 한 번 겨울이 지나간다.”

 

개인적으로 어디에 위치한 것인가가 궁금하기보다는 어째서 한국사회는 이렇게까지 퇴행을 부추기는 선택을 하고 만 것인지... 최악을 방지하는 선택을 더 자주하는 주제에 뭘 그리 낙관하고 살았나 감정이 그야말로 널뛰듯 한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는 그 겨울을 지나 지금 어디 와있는 걸까어디로 휩쓸려 갈 것인가무엇을 착각하고 있을까또 한 번의 겨울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많이 다치게 할 것인가... 생각을 하기도 싫다.

 

이 작품은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뭘 던져 넣어도 잠시의 파문만 일고 고요해지는 호수 바닥 같은 엄마가 그대로 가라앉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빛이 닿지 않는 반지하 여덟 계단을 끝내 못 올라온 얘기가 아니라고 해서읽으며 따라 가보고 싶었다.

 

한참을 넘겨도 아무도 가뿐하게 오르지 않았지만 화면이 흐르듯 육성이 들리듯 지나가는 그림들이 지치고 힘들게 하지 않았다답답한 하루의 끝에 아주 작고 가벼운 웃음 하나위로 하나이해 하나공감 하나내민 손 하나작가는 나도 따라할 수 있는 확실한 제안을 꾸준히 채워나갔다.

 

지금 우리를 견디게 하는 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아니고 약속도 아닌,

신기루 같은 작은 오아시스라는 것을.

그때부터였을까? (...)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나무들 소리.

이름 모를 작은 들꽃들.

정상에서 마시는 따듯한 커피 한잔.

땀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

옆에서 웃고 떠드는 동생의 얼굴.”

 

나이가 이만한데 모르는 건 천지사방에 가득하다수험생활을 오래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그만둘 수 없을 지도 모른단 것도텔레비전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하루 종일 혼자 시간을 보내는 엄마들은 어쩌면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데는 절벽이 아니라 단 여덟 계단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도.

 

달라졌겠지..하고 나는 근거 없이 당연하게 생각한 일들이 여전히 과거의 망령 같은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계집애라고 학생을 부르는 선생상담 시간에 태연하게 허벅지를 더듬는 선생바로 신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울고만 있는 학생다행히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반친구들...’

 

사주도 회장도 재벌 3세가 아닌 직원도 알바킬러가 될 수 있다는 것도면접에서는 나이 많은 남자가 여전히 눈으로 몸을 더듬는다는 것도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은 광고지 구인란을 수학 문제집 보듯 살펴본다는 것도플라스틱 빗은 공장에서 기계가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본드 작업을 한다는 것도.

 

그녀들은 어디로 갔을까어느 방에서 살까연말에는... 내년 봄에는 여덟 계단 밑으로 쓸려 내려간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이 많을까... 사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편해진더 자주 웃으며 사는 이들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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