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첫 문장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
윤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평점 :
살면서 죽을 뻔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절하거나, 부다페스트에서 폭설로 갇히기도 하고, 영국에서 타고 있던 버스에 불이 나기도 하고, 경유하던 도하 공항 근처에 폭탄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다에서 조류에 휩쓸려 가기도 하고, 암 수술도 받았다. 운이 좋아 늘 누군가가 구해주었는데, 그러고도 종교도 없고 신비주의자도 못 된 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이 책의 남자는 어린 시절 네 번이나 죽을 뻔했고, 살아남았으니 죽음에 무심해졌다. 행운의 남자라 여겨지기도 하고 결혼을 하고 직장도 다니며 살았는데... 딸이 죽었다. 괴로워하던 아내는 떠나고 남자는 권고사직을 당한 후 노숙자 생활을 한다. 늘 무언가를 적는데, 남자의 글쓰기에는 질문이 하나 있다. 딸이 쓴다면 ‘첫 문장’은 무엇일까.
“딸은, 이라고 썼다가 두 줄을 그었다. 어릴 적 정연은, 이라고 썼다가 또 지웠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는……. (...) 딸이 살아 있다면 어떤 첫 문장을 생각했을까? (...) ‘나는 열일곱 살.’ 딸이라면 그렇게 담백하게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일곱 살.’ 그렇게 적은 다음 나는 수첩을 덮었다.”
딸, 정연... 아버지인 남자의 글에서 관계와 대상으로 떠오르던 딸은 마치 자신이 쓰는 글인 양 ‘나’가 되었다. 왜 눈물이 날까. 내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일을 힘들어하고, 실은 거의 시도도 하지 않고 살아서인가. 언제나 ‘나’에서 출발해서 그들로 가는 시선에 자그마한 이해와 해석을 달아둘 뿐.
그래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언제 결심할 것인가.
출구가 다섯 개나 되는 로터리에 도착한 남자가 잠시 부럽다.
매번 요약도 감상도 못 하고 읽기만 하는 윤성희 작가님의 작품,
이번에도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