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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입니다, 고객님 - 콜센터의 인류학
김관욱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년도도 기억이 안 나는 오래 전이지만, 처음으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들었을 때의 당황했던 기분은 또렷하다. 하마터면 뭐라고 하셨나요... 되물을 뻔했다. 무작위의 완전한 타인을 사랑한다고 매일 거듭 말해야 하는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 것인가. 물론 견뎌야했던 혹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것 말고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 일이 아니라 그런 멘트는 그만둬야한다는 의견에 동참한 것 외에는 아는 바도 깊은 공감도 한 기억이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문화인류학자이자 가정의학전문의로서 10년 간 콜센터 상담사들의 근무환경을 조사하고 건강 문제에 대한 연구 분석을 하였다. 절이라도 하고 읽어야할 듯 기분이 엄숙해진다. 세상에는 이런 일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김관욱 덕성여대 교수는 그 동안 숱하게 받은 “왜 하필 콜센터를 연구하나요”란 질문에 “낮은 임금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사용하면서 이들의 건강을 조금씩 빼앗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고정 관념마저 재생산하고 있다고 느끼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엄청난 노동 강도를 견디며 국가의 산업 육성에 참여하고 부모가 다 감당하지 못한 가정도 책임지고 동생들 혹은 오빠들을 먹이고 공부시킨 수많은 살림밑천, 맏딸 혹은 누이동생들은 산업 역군이 아니라 공순이로 더 많이 불렸다.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된다는 협박용으로도 쓰였다.
당시의 구로공단은 어느새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었고 콜센터에는 상담사들이 자신들을 콜순이라 자조하며 예전과 다르지 않은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을 담당하고 있다. 이 책에 묘사되 업무 풍경은 읽으면서도 숨이 막힌다. 경쟁은 상담원들끼리 붙이고, 실적이 좋으면 ‘경주마’가 되어 따로 관리된다. 총체적 노동 통제!
화장실은 관리자가 정한 시간에 간다. 진상 고객 얘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모욕적이다. ‘지금 전화 받는 사람은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카피라이팅이지만 가해는 고객으로부터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주변에도 흡연을 하는 이가 없어 잊었다가 깜짝 놀란 부분은 상담사들의 흡연이었다. 갖가지 종류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감정을 받아내고 나면 짧은 시간 흡연을 하며 한 숨을 내쉰다. 이렇게 요약하니 평범한 일 같기도 하지만 세찬 충격을 받은 현실이 적혀 있었다.
“거듭된 사과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민원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마침내 통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생각나는 건 오로지 담배 뿐이다. ‘닭장’ 같은 사무실을 빠져나와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연기를 내뿜는 건지, 한숨을 내쉬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천국이다. 하지만 불과 4분짜리 천국이다. 조만간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을 또 해보지만 민원인의 ‘욕받이’ 노릇을 한 직후 옥상에 올라가면 떠오르는 선택지는 둘 뿐이다. 뛰어내릴 것인가, 피울 것인가.”
회사에서 금연을 권하는 이유는 ‘자궁을 가진 존재로서 임신을 위해’. 쓸모도 없는 감정만 들끓는 나와 달리 김관욱 교수는 10년간의 현장 연구와 심층 인터뷰 이론의 집대성을 통해, 갑질 논란이나 감정 노동만이 아닌 산업체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한다. 여성 노동과 인권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례이다.
언론에서 뽑아내는 제목 이상의 것을 궁금해 하지 않고 산 탓에 몇 가지의 요약으로는 표면조차 긁어낼 수 없는 이들의 노골적인 노동 환경에 대해 배웠다. 하청구조나 정규직 전환의 구호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안다고 생각한 것은 다 무지였다.
의사로서 한 직군에서 도드라지는 유병률을 보고 병증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을 유발하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 환자의 건강과 안녕을 10년간 물어온 의사이자 학자가 수고한 연구의 집약체이다.
사회적 의제를 다루고 정리한 완성도가 높다. 2016년 기준 200만 명이 넘는다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사회 여러 분야의 의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관련법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한다.
“수화기 너머에 ‘얼굴과 몸을 가진’ 사람이 있다.”
“여성 노동자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고 부당한 노동 때문에 질병을 앓는 이웃이 없는 사회가 오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