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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평점 :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이 틀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질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을 유지한다. 그래서 정신의학은 사람을 ‘사람’보다는 ‘환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가 정신의학전문가로서 지적한 내용이 너무 당연해서 문장을 읽고도 이게 무슨 문제인가, 학문과 치료의 대상은 지명하기 전에 이미 실존하는 것 아닌가, 내 속에서도 부대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고 무의식적 행동이 된 것이다. 오래된 일이자, 이런 학문 방식은 사람이라는 존재와 ‘괴리’ 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트라우마 현장에서 전문가들이 “도움이 되는 도움을 달라”고 했다니... 놀라고 충격적이다. 당사자분들은 더하셨을 터.
“아이 잃은 고통을 조롱하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들에 의해 영혼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도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은 자신을 환자로 바라보는 의사의 시선에 의해 다시 상처를 입는다.”
타인이 나의 고통에 집중하고 깊이 이해하고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 복잡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없어서 더 그러하다.
그렇게 트라우마 현장이 아닌 일상의 상처들로부터도 이런 심리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서로를 적당히 봐주며 적당히 모른 척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이 ‘냉정한 의학 기능공인’ 자신에 대한 고백서라고 한다. 공감보다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재빨리 생각해내고 찾아내려는 반응, 즉 ‘문제를 해결’하려는 버릇이 든 나도 고백할 것들이 가득하다.
“‘의사(또는 전문가)’라는 느낌은 내게 늘 안전한 경험을 선사했다. 견제당할 수 없는 자격증의 성채 안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확고한 주도권을 쥔 전문가였다. (...) 자격증은 내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 그 답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갈등하는 시간을 건너뛰더라도 마음을 덜 불편하게 했다. 자격증은 ‘내가 답을 가졌다’는 징표처럼 느끼게 해줬다.”
저자인 정혜신 의사가 바꾼 것은 ‘환경’이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만났다. 공간이 바뀌자 환자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자격증이 주는 우월감도 보호도 사라지고 심리적 진검 승부만 남았다고.
“‘환자’라는 틀로만 바라봐도 괜찮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 남보다 특별하게 예민한 구석도 있다. 거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
“트라우마 현장은 벌어진 상처가 오염 속에 그대로 노출되는 야전이다. 깨끗한 소독실도 수술실도 없다. 상처 위로 흙먼지가 올라오고 언제든지 2차, 3차 트라우마가 덮쳐서 덧난다. (...) 그곳에선 상처를 적당히 외면한 채 전문 지식이나 언변으로 눙치고 넘어갈 수 없다. 넘어가지지도 않는다.”
“자신은 환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절규하지만 세상 어떤 환자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이 자기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까지는 매순간 진검 승부가 필요하다. 자격증으로 치유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불가능하다. 그곳에서 자격증은 무용지물이다. (...) 외형이 아름다운 품새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최우선이 실전 무술이 이기는 살벌한 싸움터다.”
그러니까... 저자의 적정 심리학이란 전문가, 자격증이 앞서지 않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시선과 태도이다. 스스로도 돕고 지인도 돕고 낯선 이들도 돕고.
-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 내 삶은 물론 내 옆 사람을 도울 수 있고
- 때론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이웃을 살릴 수도 있는 실제적인 치유 팁
-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위력을 갖는 실용적인 심리학
거의 모든 과학기술분야가 산업자본의 영향 하에 놓여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정신의학 역시 의학과 과학의 영역을 떠나 산업의 문제가 된 지 오래...라고 한다. 이 구조에 그저 따르면 우리는 사람에서 환자로가 아니라 소비자로만 취급될 지도 모른다.
이거 먹으세요, 저거 먹으세요, 이 운동 하세요 저 운동 하세요, 특산물, 약용식품, 약, 운동 기구, 운동복, 운동화, 운동 장비들... TV를 켜는 일이 거의 없지만, 사회 공간 곳곳의 대형화면들에 가장 다양하고 공격적인 것들은 광고이다. 쇼닥터들도 드물지 않다.
뇌과학을 21세기의 해답서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나, 저자가 전하는 ‘공감’에 대해서, 적정 심리학에 대해서 저항감 없이 잘 읽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