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정치적 동물의 길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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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beings are by nature political animals, because nature, which does nothing in vain, has equipped them with speech, which enables them to communicate moral concepts such as justice which are formative of the household and city-state (1253a1-18). Aristoteles
 
한때 교과서에도 버젓이 실린 사회적 동물이라는 무근본 번역은 깨끗하게 사라지기 바란다. 그리스는 도시국가polis 체제이고 거기에 사는 인간은 도시국가의 방식에 맞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정치적political이며, 그래서 치안을 담당하는 직업을 경찰policemen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런 삶이 싫다고 떠난 ‘자연인들’은 논외의 대상인 것이다. 그 도시국가들의 스케일이 커져서 국민국가가 되었다.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적을 가진 모든 이들은 따라서 여전히 정치적political이여야 한다.
 
“산다는 게 징글징글한가? 징글징글한 나머지 산 속으로 잠적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답이 없는 세계에서 좋은 세상 보겠다고 싸우다가 지치면, 세상을 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뜨지 않고 버티는 데 정치가 있다.”
 
정치란 내 삶의 모든 영역을 결정하는 합의이고 협의이기 때문이다. 논의할 때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나는 동의 안 했다고 불평불만을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큰! 문제이다.’
 
폴리스polis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저이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
 
쓰다 보니 이책의 분위기에 반하는 안티글이 될 것 같아 얼른 정신을 차린다. 김영민 교수는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정치를 사유하고, 동서고금의 철학, 책, 뉴스, 드라마, 영화 - 아주 많음 - 에 대해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신의 코드로 엄청난 수다(?)를 들려준다.
 
유쾌하고 재미있다. 정치사상이나 이론을 막 함축적으로 설파하는 내용은 없으며, 정신없이 재밌게 읽다 보면 좋아했던 영화들이 소환되면서 더 큰 재미를 느끼게 된다. 관련 내용이 아주 많으니 개별 소개와 인용은 생략한다. <파리대왕> <폭풍 속으로>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아이리시맨> <모노노케 히메> <D.P> 등.
 
“악의 존재에 맞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온 역동적인 정치사가 한국에는 있다. 실로 현대 한국인의 마음에는 대규모 정치적 시위가 준 효능감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각인되어 있다.”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의 언급은 좀 아프다. 조커가 간파하고 의도한 대로 ‘정의’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고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일까.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정의를 불러오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두 인류의 성인처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고 나와야 하는 걸까. 온갖 실수를 저지르지만 한 때 한 가지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결점투성이인 사람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위선일까.
 
그런 도덕성의 신화를 서사구조로 만들어 내세운 것이 하비 덴트이고 한국 현대사의 운동권이었던 것도 맞다. 텍스트나 콘텐츠보다 이미지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시대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까. 그러면 정치 행위에 있어 이미지 전술은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유쾌하고 재미난 수다라 저자의 이야기를 몇 시간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도 글은 자꾸 이러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웃다 죽을 것처럼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흥미로운 의식의 흐름은 여전히 좋고 그 정도로 웃지는 못했다. 주말 동안 언급된 영화들 중 한 편을 보고 싶다는 생각.
 
“불과 100여 년의 시간 동안에 왕조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무시해온 이웃 나라에서 강점당하는 식민지 체험을 겪고, 동족의 배때기에 죽창을 쑤시는 상잔의 전쟁을 거쳐, 끼니를 걱정하는 빈국에서 (...) 부국으로 도약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쓴 나라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한 이 나라가 어떻게 ‘헬’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한국은 지옥불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을린 가옥이며, 한국인은 지옥불을 견디고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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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보기에 전쟁, 지진, 홍수, 판데믹, 호환, 마마보다 참담한 재앙이란 바로 담담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다. 다 귀찮아하는 상태다. 그래서는 이 세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 뼛속 깊이 귀찮아하는 사람은 삶 자체도 귀찮아하므로 인류의 멸망 따위를 크게 개의치 않는다. (...) 사람들이 귀찮은 나머지 아무 것도 안 하다가 멸종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 욕망이 없다면 이 세계는 텅 비어버리고 말 것이다.”
 
“제대로 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유아적으로 행동하기를 그치고 정치적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가 말한 것처럼, 미성숙한 인간들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권력(power)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뭔가를 해내기 위해 발휘하는 그 모든 것이다. 군사력, 경제력, 정신력, 정치력, 매력, 지력, 자제력, 드립력, 이 모든 것이 권력이다. (...) 욕망과 목표가 있으면 권력은 존재하게 되어 있다. 모든 권력을 싫어한다는 말은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말이며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것은 삶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여러 일을 가능하게 한다.”
 
“아무 것도 도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 마음의 고요를 얻기 위해서도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는 어떤 나직한 힘이 필요하다. 정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겠다면 어딘가 조용히 숨어서 자신의 멸종 소식을 기다려라.”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하고, 살아가는 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맺는 이상 정치체에 속하지 않을 수 없고, 정치체에 속하는 한 누군가에게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 (...) 실로 놀랍지 않은가, 다수가 소수보다 분명 강할 텐데, 그 강한 다수가 결국 소수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적 허구가 그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 허구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구를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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