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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ㅣ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독일 법학교수가 추리소설을 발표했다. 독일의 도시 중 가장 익숙하고 자주 방문했고 오래 머물렀고 친구들이 사는 하이델베르크... 칸트도 여기 살았고, <몬스터>의 거리 배경은 눈 감고도 길을 아는 알트슈타트Altstadt이다. 어쨌든 이 책의 저자도 하이델베르크에 살았다는 것만으로 느낀 가공의 친근감으로 오래 전 읽어 본 작품이다.
이후에 영화 <더 리더>가 나왔고, 원작이 있는 영상물을 상당히 깔보는 버릇이 있는 나로서도 몇몇 장면들은 빛나도록 강렬했다. 나이 들면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생을 잘 찾아보리란 섣부른 계획도 세웠다.
<미녀와 야수>의 최고로 설레는 장면은 야수가 책으로 빽빽한 서재를 자랑하는 장면이다. 본모습이라는 왕자로 돌아간 후의 분위기는 책은 거들떠도 안 보고 말 타고 놀러 다닐 가볍디가벼운 분위기. 이건 나만이 아니라 함께 간 친구들 모두가 “뭐야, 야수 돌려줘~”를 외쳤다는 데에서 근거가 없는 느낌은 아니라고 주장하...
하이델베르크에 사는 나의 이전 직장 상사이자 생일이 같은 오랜 친구 역시 면접에서 책과 작가 얘기하다가 친해진 사이이다. 어쨌든 산만한 의식의 부유함과 더불어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어본다. 제목이 여전히 설레는 이유는... 살아보니 책 읽는 남자들이 귀하고 책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더 귀하다는 깨달음에도 일부 기인할 것이다.
이 책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 미하엘이 한나에게 읽어 주는 책 중에는 <오디세이아Odysseia>가 있다. 대하소설이 아닌 개인의 서사가 드물기도 하지만, 이 둘의 관계와 삶도 시난고난하게 역사와 맞물려 펼쳐진다. 책을 읽어 주는 장면들은 지치고 노곤하고 평온한 상태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목숨을 삼킨 역사는 뜨겁고 질척이지만 인물들로부터 감정적 구토나 패악은 없다. 내 삶이 아님에도 참 고단하다. 한나가 평생 밝히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지키는 일이 힘겹고, 종신형과도 맞바꿀 상처가 무겁고, 뭐랄까 이 모든 여정에 빛나던 아마도... 사랑이 굳건하게 남은 모습이 낯설다.
육성과 육필이라는, 육체가 단단히 결합한 단어들을 새삼 쳐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