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 - 신들의 전쟁과 인간들의 운명을 노래하다 주니어 클래식 16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 독서의 순간들을 기억해보면 재밌고 만족스럽고 감동스러운 경험보다 의외로 그렇지 않는 일들이 더 생각난다그런 기억이 오래 남아서일지도 모르겠다한국전래동화는 호러의 최고봉이었고세계명작동화 역시 무서운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떨기도 울기도 했다.

 

21세기의 아이들은 친절하게 전달되는 여러 배려가 담긴 책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그리스로마신화도 재밌게 읽는다고전문학도 읽지만 멋진 창작동화들도 많아서 독서에 대한 경험들이 비교불가하게 다양해졌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같은 작품은 번역을 접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읽기가 더욱 어려웠다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던 번역성경체가 성경책 읽기를 꺼리게 만든 것처럼주니어 클래식 시리스로 출간되는 일리아스라니... 격세지감을 느끼는 옛날 사람이다요즘 아이들 부럽네!

 

호메로스 눈 먼 사람이라는 뜻실존 인물 여부 모름구전을 편집한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음.

** 일리아스 일리온(트로이의 옛 지명)의 노래라는 뜻.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한 두 개도 아닌 여러 단절을 존재에 품고 사는 일이라근원을 궁금해 하는 오랜 질문이나 일관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고전에 대한 경험도 공부도 부족했다그나마 교과서에 잘려서 실린 작품들에 얼마나 공감하며 즐거운 독서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

 

이런 단절들언어의 문제역사문화사회적 괴리는 나이가 들고 경험한 세계가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거듭 접하면서 비로소 난제에서 그럴 수 있는 일들도 바뀌어갔다. ‘고전이란 명칭이 붙은 철학과 문학을 불편함과 거부감 없이 만나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분노는 떨어지는 꿀보다 훨씬 달콤해서 인간들의 가슴속에 연기처럼 퍼져 버려요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어요.”

 

사람 사는 일의 공통적이고 유사한 어려움들을 경험하고 나면 철학과 문학에 담긴 보편적 사유질문고민들도 끄덕이며 읽을 수 있다상상력은 현실의 경험을 재료로 해서만 발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데이터가 늘어날수록 아직 남은 괴리를 채우는 일도 조금씩 수월해진다.

 

“<일리아스>의 어느 곳을 읽어봐도 그리스인이라는 표현은 없다. (...) 기원전 약 750년 경에 기록된 <일리아스>에는 여전히 헬레네라는 명칭도 찾을 수가 없다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가정되던 시대에 그리스인은 과연 자신들을 어떻게 불렀을까그들은 자신들을 아르고스인들아카이아인들다나오스인들이라 불렀다.”

 

2천 년 전의 인간의 삶갈등과 전쟁시련과 고통사랑과 우정죽음과 신... 그로부터 내내 살아남아 인간의 시간으로는 충분한 불멸을 얻은 이야기읽다 보면 다른 후손들의 말과 글로 여러 번 만나본 낯설지 않은 삶의 모습들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오만을 가장 경계한다근본적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오만을 범하게 된다. (...) 이것은 단지 영웅에 국한되지 않는다인간은 누구나 지나치게 행운이 따르면 오만에 빠지기 쉽다.”

 

매번 새롭지만 이제 마지막이 아닐 트로이 전쟁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시 만난다열심히 산다는 일이 가끔 바닥 모를 허망함에 짓눌릴 때시련과 한계와 역경을 극복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오래전 인간의 원형을 만나는 일은 일종의 그리움이자 적절한 위로이다.

 

아킬레우스는 불멸하는 영웅이다.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죽는 장면이 삽입된다면 그리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라기보다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기념하는 노래로 기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신화를 다룬 다른 작품 <아킬레우스의 노래>에서 만난 파트로클로스가 유령이 되어 아킬레우스의 꿈에 나타난 장면은 여전히 인상적이다나이가 들수록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까워지거나 흐려지는데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이제는 덥석 반가울 지경이다.

 

꿈을 매일 꾸는 게 맞는지매일 잊을 뿐인 것인지잠든 시간이 그대로 무화되어 삶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삶에그리움을 가진 존재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마련된 공간인 꿈을 통해 만나는 애틋함과 간절함이 좋다.

 

상당히 흐릿해진 영화 <트로이>에서 만난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트로이의 마지막 왕이자전쟁의 진짜 영웅인 프리아모스도 잊었던 지인처럼 덕분에 떠올려본다장영란 교수의 번역과 해설이 가독성은 늘리고 재미는 줄이지 않아 즐겁게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