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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사미 린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우사미 린 작가의 작품은 두 번째입니다.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이 작가의 작품을 읽거나 감상할 수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느꼈거든요. 낯설어서 어려울 것 같아, 어리고 연약해서 보기에 눈이 시릴 것 같아, 피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해 하며 계속 읽네요. 시작부터 화들짝 놀라면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욕조에서 금붕어 잡는 내용입니다. 뭐 이런 아찔한... 세 장을 채 못 읽고 잠시 쉬었습니다. 몰랐던 갈증을 채우는 아... 맘에 드는 소설... 기쁩니다. 안 읽은 분들 꼭 스포일러를 피하시길.
한편으로는 섬세한 정서와 문학적 감수성으로 읽어 달라고 하는 문장들이 빼곡한데,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 글자만 읽고 지나가려니 울적합니다.
“매번 그렇듯이 엄마는 어제의 난동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방의 끔찍한 상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 툭하면 술 마시고 날뛰니까 집 안 꼴이 처참했어요. (...) 엄마는 내일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감각적 표현들이 감각적으로 읽혀서 자꾸 놀라며 읽습니다. 찢어진 발이 내린 눈에 닿을 때는 머리가 쭈뼛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이라 여기는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우짱은 그래서 타인과 거리 두는 법을 모르고 상대를 몸 안에 넣고*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극단적인 공감을 합니다.
* 일본어 어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라, 저는 그냥 설명을 따라 읽고 맙니다. 자신이 원하는 표현에 맞는 언어조차 섬세하게 쪼개고 붙여 활용하는 감각적인 작가란 짐작만 해봅니다.
무심함을 가장한 잔인하고 무례한 가족은 빠지는 법이 없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많겠지, 하고 잠시 우울해집니다. 자식에게 너는 덤으로 낳았다고 하는 엄마의 어머니. 그런 자신의 엄마에게 상처받고 그래도 사랑받고 싶은 엄마. 엄마의 몸에 상처와 흉터를 남기는 아빠.
“우짱은 중학생 무렵부터 인터넷에 불평을 늘어놓는 빈도가 차츰차츰 늘어났습니다. (...) 엄마가 발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아빠가 바람피운 사실에 집착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인지 (...) 아무튼 엄마는 뿌리 깊은 무언가에 괴로워하며 망가지고 있었죠.”
월요일이라 힘에 겨워 얇은 티저북, 가제본만 집어 들어 읽는데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네요. 린 작가의 서사에 찬기가 없는 실내에서 자꾸만 소름이 오소소 돋습니다.
“발광은 한자로 ‘發狂’이라고 쓰는데, 그건 갑작스러운 게 아니에요. (...) 낮잠을 자다가 어스레한 해 질 무렵에 깼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불안과 공포가 망가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숨어 들어오는, 그런 것이 발광입니다.”
이상하지요. 발작(發作)이란 단어는 꽤나 썼는데 발광(發狂)은 저는 써 본 적이 없어 낯설고... ‘망가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숨어 들어온다’는 불안과 공포가 너무나 무섭습니다.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스스로 몇 번이고 덧그려서 더욱 깊게 상처를 내고 말아, 혼자서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도랑을 만드는 일이, 그리고 그 도랑에 레코드 바늘을 올려 단 하나의 음악을, 자기를 괴롭히는 음악을 이끌어내 반복해 들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우는 일이.”
내 몸처럼 엄마를 느끼는 우짱은 ‘경계가 모호해서 언제나 피부까지 공유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발광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자해 행위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엄마도 우짱처럼 자신과 타인의 육체를 동일시하는 동류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웃는 척하던 아빠의 뺨이 굳더니 순식간에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졌습니다. 오른쪽 어깨가 재빠르게 앞으로 쏠리자, 우짱은 반사적으로 뺨 앞을 오른팔로 가리려고 했습니다. (...) 옆에서 보면 결국 둘 다 어깨를 움직인 정도로 비슷한 동작을 취했을 뿐이지만 (...) 그건 때리려는 인간과 맞지 않으려는 인간의 움직임입니다.”
반복해서 마주해도 쉬워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결혼과 출산에 관한 일종의 자격시험,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하는 걸까요. 체력도 능력도 무기도 딱히 없는 생물종인 인간이 왜 이다지도 폭력적일까요.
“내가 여자인 것, 아이를 배고 낳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 정체 모를 성별을 가장 못 참겠어. 남자 때문에 일희일비하거나 울부짖는 그런 여자는 되기 싫어,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되기 싫어. 여자로 태어난 이 울분을, 슬픔을 니는 몰라.”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상처 내는 나잇값도 못하는, 약을 대량으로 먹고 토하는, 식칼을 벽에 찌르는, 알레르기가 있는데 땅콩을 먹으려 하는... 이런 엄마를 보는 자식에게 원망이 가득 차는 일을 어떻게 막을까 싶습니다. 괴로운데 참고 참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1999년 생 작가가 2019년 이전부터 썼음이 분명한 이 작품에서,어린 시절 보고 말았던 부끄러운 어른들의 모습들을 끄지 못하는 화면처럼 읽습니다. 특히 한 때 자식의 신이었던 부모가 정리된 내용이 한숨이 나오게 허망하고 쓸쓸합니다. ‘잔소리를 퍼붓고 때리고 미치고 그러다가 곧 늙어 쓸쓸함을 남기고 가버리는.’
우짱에게 신이었던 엄마, 그 엄마가 집착하는 엄마인 할머니,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거듭 실패하고 자식마저 증오하게 된 존재. 그래도 우짱은 엄마만을 사랑했습니다. 오래 전 아빠의 폭력에 함께 맛 본 흙과 피 맛을 떠올리며 우짱은 기원하고 싶은 단 하나의 바람이 생깁니다.
타인을 그토록 사랑해서 절규가 된 바람은, 금붕어를 만난 장면의 강렬함이 수만 배로 분화하듯 사방으로 퍼집니다. 잠시 머릿속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사미 린 작가가 나이 드는 게 무섭습니다. 그가 가진 예리한 빛들이 뭉개질까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