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숲 책 먹는 고래 27
심강우 지음, 서혜리 그림 / 고래책빵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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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름도 지어주고 있다고 믿고 심지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있지요그 중 최고는 시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블랙홀보다 더 놀랐던 것이 시간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것사람들 놀랄까봐 시공간timespace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 그냥 공간만 존재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그레고리력을 만들어 써오긴 하지만자전 공전 거리 속도에 있어 변화가 생기면 시간도 변하겠지요실제로 하루는 똑같은 24시간이 아니고 지구의 궤도도 변하고 있어 1년은 매년 짧아지고 있습니다.

 

http://naver.me/IMQ0ElzX

꼭 한 번은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모은 것이 인간의 역사이지요생물학적으로는 신석기 시대 이후로 뇌의 진화가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그래도 기록이 남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우고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상상합니다.

 

판타지 장편동화라는데쉽지 않은 현실의 모습들을 차분하게 담아서 상담치료를 경험하듯 풀어내어 주는 이야기입니다물리적 세계의 현상이 어떻든 시간과 기억과 역사는 각자에게 의미와 가치와 수명이 다르겠지요.

 

엄마아빠 목소리 기억나?”

 

기다려얼른 가갔다 오올게. (...) 말을 바삐 하느라 더 더듬거렸던 말내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된 말이에요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칸의 마지막 말이기도 해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는 물음에 친구들은 귀신이나 좀비라고 해요하지만 나는 달라요내 경우 내 비밀을 엄마가 알게 되는 거예요나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예요.”

 

재혼 가정새부모새형제자매경험이 없어 모르지만 타인들이 어느날부터 가족이 되어 함께 사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요운이 좋으면 잘 맞고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여러 노력이 필요하고때론 노력으로도 안 될 때도 있습니다재혼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인간관계가 다 그렇지요.

 

국적이 다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한국어도 잘 못해서 마냥 좋아하지 못한 새 아빠오래 알아갈 시간도 없이 사고로 돌아가십니다그리고 그 죽음에 소연은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괴로워합니다가족에게 말 못한 비밀이 있는 아이는 그 상처를 어디서 치유할 수 있을까요작가는 그런 아이를 위해 상상의 세계어쩌면 실재하는 다른 시공간을 열어 줍니다.

 

무척 낭만적이게도 전시회에 갔다 그림속 세계에 초대받습니다개울을 기준으로 잊소 싶은 시간’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 흐르는 곳입니다소연은 그곳에서 만난 루빈과 함께 숲을 걸으며 시공간이 혼재하는 누군가의 기억 속을 여행 합니다.

 

루빈의 기억 속은 아주 무섭고 슬픈 장면들이 많습니다배경은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던 때입니다가족이 모두 끌려가서 살해되는데 루빈 역시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는 아주큰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그리고 루빈의 어릴 적 친구 역시 친구를 구하지 못한 깊고 아픈 상처가 있지요.


 

큰 불행을 겪은 아이들이 자신을 탓하는 일 역시 드문 일은 아니지요무엇도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 그런 감정과 생각을 파할 수도 없으니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막을 수 없는 가대한 폭력과 범죄를 그때 자신이 이랬다면저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고 거듭 스스로를 벌주는 방식이지요.

 

소연은 루빈과 함께 여행하며 루빈과 친구 사이의 오해를 푸는데 도움을 줍니다소연은 기억들을 보며 루빈이 자기 잘못을 확인하는 게 두려워 친구를 미워하게 되고 그 역시 결국엔 자신을 지독히 미워하는 감정의 반향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새 아빠 칸에게 일어난 일 역시 비슷한 상황이 있지요아파서 열에 들 떠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말...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신체의 자유와 더불어 정신의 자유기억으로부터의 자유도 인간에게 꼭 필요합니다남에게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계획적으로피해를 주지 않는 한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입니다그러면 인간이 경험한 기억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저는 이 문제를 아주 오래전에 무척 심각하게 고민해봤고 지금도 가끔 생각해봅니다.

 

나를 고유한 나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유일하게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내가 가진 진짜 내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세상에서 딱 하나 생산한 물건이라도 또 모르겠지만상품으로는 를 규정할 수도 구분할 수도 없지요.

 

그러면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일까요그래도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요혹은 양자역학이 설명하는 세계처럼 확률적으로 둘 다 일까요치매가 급성 악화된 어머니를 만난 친구의 말이 여전히 서늘하게 아픕니다자신의 존재를 잊은 어머니의 타인을 보는 듯한 경계의 시선살아서 하는 이별도 있더라는…….

 

내 속의 기억 하나하나가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바람이 되었지. (...) 우리 마음은 알고 보면 울긋불긋한 색깔이야. (...) 밝은색과 어두운색이 어울려 사계절을 만들고 세상 모든 생명체의 마음을 표현해나는 화가가 될 거야그런 마음의 색깔과 무늬를 제대로 표현하는 화가.”


 

이 그림을 내가 알았던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똑똑한 단발머리 소녀에게 바칩니다회색빛에 잠겨 있던 내 영혼의 반쪽을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바꿔 놓았던 소녀그 소녀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내 영원한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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