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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아이
남상순 지음 / 여섯번째봄 / 2021년 11월
평점 :
삼시세끼 순대국밥을 먹어도, 아니 먹으면 더 좋아할, 순대국밥에 대한 취향에 따라 낙원에 살아갈 자격 운운하는 아버지가 나오는 청소년 소설이다. 순대국밥을 싫어하는 나와 역시 싫어하는 중3이 함께 읽었다. 읽기 전부터 우리는 무척 재미있었다. 이런 설정은 처음이라 뭔가 엄청 웃길 것 같다는 무모한 기대가 컸다.
‘낙원’은 낙원 상가에 입성하지 못한 순대국밥집을 운영하던 할머니가 결성한 비주류 순대국밥 모임이다. 순대국밥에 주류, 비주류의 세계가 있을 줄이야. 그리고 이 모임을 자식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어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주인공 안수영은 초4 무렵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처음 순대국밥을 먹고 죽을 만큼 아팠다. 마음이 찡하고 아파온다. 단순히 음식이 안 맞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나저나 이 아빠가 무척 불편할 캐릭터라는 짐작은 이미 했지만, 술 취하면 잔소리와 공격성이 늘고 술이 덜 깬 상태에서는 자학과 우울 모드가 되다니, 순대국밥 대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야할 처지로 보인다.
“배우자 없이는 살아도 순대국밥 없이는 살기 힘들다.”
낙원 사람들의 모토 한 번 불쾌하기 그지없다. 친절한 금자씨 모드로 전환되고 싶은 심정에 울컥. 순대국밥도 싫은데 비주류 모임은 더 싫네.
주인공의 이런 아빠가 연애를 한다는 소식에 차분히 읽어야 할 독자의 입장을 망각하고, 화가 치민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인간을 만난다는 거야? 고모의 말은 더 가관이다.
“아빠에게 밥 차려 줄 사람이 필요해 재혼을 하라고 하다니, 너무 무개념 발언이라 짜증이 났다.”
수영이 시원하게 평가해줘서 조금 진정된다.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확실히 미워하다니 뭘 읽으면 이 발끈함이 문명화될까.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 이상을 감당하려하고, 다른 한편 친구와 세상의 모든 계모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겁을 내는 모습이 귀엽기도, 애틋하기도, 안타깝기도, 속상하기도 하다. 와중에 여행 가방에 넣어 깔고 앉거나,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어 사망한 아이들...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숨진 아이들의 뉴스들은 여전히 참담하다.
“친구든 어른이든 여자들은 모두 다 조금씩 거북하다. (...) 왜 그럴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아마 내가 여자들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소년이어서가 아닐까.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한 행동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추방이다.”
아빠를 선배라고 부르는, 연애 중인 듯한, 수영의 과외 선생님 역할을 하는 ‘하이힐’이 순대국밥을 먹기 곤란하다고 하는데 계속 설득하려는 아빠에게 한 말에 다시금 분노를 식힌다. 그나저나 이런 사람을 왜 만나는 겁니까…….
“순대국밥이 선배의 로망인 것은 알겠는데 저한테까지 강요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 그럼 이게 강요가 아니면 배려겠어요?”
현실에서 만나본적이 없어 정확한 멸칭을 생각해낼 수도 없는 이 인간이 기어코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의 숟가락을 빼앗아 강제로 떠 넣으려고 한다.
“처먹어, 처먹어! (...) 너 오늘 이거 다 먹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수영은 결국 탈이 나서 입원을 한다. 그리고 생선 초밥을 사들고 온 아빠에 대해 마지막 분노가... 화가 나는 대신 얼어붙는,,, 기분이 든다. 수영의 말대로 구제 불능,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려야한다.
“사내자식이 어떻게 회도 싫어하냐. 이해가 안 되네.”
그렇다고 이런 결말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후련해도 되는 걸까. 작가님 감사합니다.
* 낙원 [樂園, paradise, paradeisoe] : 고대 오리엔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 ∙ 서유럽, 이슬람 미술에 넓게 존재하는 중요한 표상의 하나이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옛 이란어 ‘담으로 싸인 마당’에서 연유하였고, 그리스인에게는 ‘페르시아왕의 정원’을 의미한다.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