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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 이 불안하고 소란한 세상에서
이윤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0월
평점 :
제목을 보고 울컥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쓰기보다 읽기를 하는 입장이지만 동기화되는 부분이 있다. 할 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살면서 한 번 화르륵...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몇 달 전 듣고 깊은 공감을 한 말, 깊은 빡침을 여러 이유로 - 상처 주기 싫고, 주목 받기 싫고, 후회하기 싫고, 정리 안 된 생각이 싫고 - 사르르 꿀꺽 삼키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다. 읽지 않아도 될 사람이 많진 않을 듯하다.
“괜찮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 이 선량하고 무해한 저자의 문장을 나는 “책 읽자 당신은 평생 그렇게 살아.”로 바꿔 읽는다. 저주하는 버릇 빨리 그만둬야 하는데……. 책과 영화는 들썩거렸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의 의식이다. 책은 나의 속도로 읽을 수 있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고 영화는 책장 넘길 기운도 없다 싶을 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더 좋다.
저자에게는 의식 같은 동아줄이 글쓰기이다. 내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라 흉내내볼 엄두가 안 나는 대단한 방식이다. 내 의심이 정당(?)했다는 것이 완독 후에 확신으로 증명되었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는 해소가 아니라 충전의 방식으로 작가를 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설픈 대화, ‘말’보다는 어쨌든 누군가의 거름망이라도 한 번 거친 ‘글’이 편하고 그래서 읽기가 편한 나는 저자가 ‘쓰기’라는 방식을 ‘글’을 택한 것을 또한 접점이라 여기고 묘한 동지애를 느낀다. 그러면서 말하듯 글 쓰는 내 이율배반은 어쩌나…….
일기도 아니고 사회과학서와 에세이를 오가며 매서운 타격과 웃겨주는 위트를 겸비한 필력의 글을 두고 이 무슨 건방진 비교인가 싶기도 하다. 뜨끔한 각성을 일으키는 진지한 글도 많고 재미난 글도 많지만 감탄이 나오는 적절한 어울림은 많지 않다.
나이 드니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자꾸 울컥거린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지 않아 혼자인 시간은 더 절실해진다. 게으른 성격 탓에 남이 다 해놓은 결과물을 적당히 이용해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으니 뭘 써야 할지 모르면서 뭐라도 써볼까 싶기도 하다.
“내가 보낸 글들은 어디를 헤매고 있으려나. 언제쯤 당신에게 이윽고 한 끼가 되려나.”
: 헤매지 않고 잘 도착했습니다. 감사한 여러 끼가 되겠습니다.
“글을 쓰다 한 번씩 두려워질 때마다 나는 외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글은 결국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글이다.’”
: 제목에 끌린 이들에게는 이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필요가 있을 거라 믿는다. 비슷한 통증을 가진 사람들은 의외로 서로를 잘 알아본다.
“저자로서, 글을 썼다기보다는 똥을 쌌다고 느껴질 때 마음을 붙잡는 법. 나보다 많이 알고 많이 겪고 많이 써본 사람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더 많이 알고 겪고 써도 두 개의 프리즘을 가질 수는 없다.”
: 공들이지 않는 내 글에는 깨소금처럼 뿌려지는 묵은 버릇이 있다. 원칙은 그냥 써라, 쓸 말이 없어질 때까지, 막 써라, 이지만 아주 오랜 제도권 교육 탓에 나중에 읽어보면 교훈과 권유와 비판 등이 흩뿌려져 있다. 이 무슨 추태인가 싶지만, 양질전환이 일어날 때까지 그냥 막 써보기로 했다. 저자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만난 문장들이 마음에 들어 ‘똥’을 찾지 못했다.
“흔히 책을 읽는 것도 소통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현실 소통' 에 쉽게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그래서 재밌다. 행간을 잘못 읽어도 책은 잠적하거라 꾸짖지 않으니까. 내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해도 내게 피해가 돌아오진 않으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까.”
: 요즘 내 삶에 뚜렷하게 등장한 소통. 말로 하는 소통은 쉬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낯선 사람의 육성도 처음엔 잘 안 들린다. 그 점이 외국어 공부할 땐 뻔뻔함으로 도움을 주었다. “난 원래 모르는 사람 말 잘 안 들렸어.” 어쨌든 소통에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내 책읽기에는 ‘현실소통’이란 진화한 목표는 없다. 현실에서 가능한 삶이 제한적이라, 다른 사람들 무슨 생각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것이 주목적이다. 예전에는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어딘가 머물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되기도 하며 겪은 것들은 참 느린 과정 같지만 오래 떠나지 않는다. 그런 경험과 이해는 해를 거듭해서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탄탄한 바닥이 되기도 한다.
그에 비해 책읽기는 저자의 말처럼 지나치게 쉬운 경험에서 오는 부작용이랄까, 반응, 반작용, 티키타카가 없으니 아까울 정도로 빨리 흐릿해지기도 한다.
“글을 쓰려는 마음의 저 어디 한구석에도 '남겨질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살짝 묻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릴없이 소멸해가는 것을 붙잡아보려는 안간힘. '내가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
: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다. 기록이란 매일 사라지고 있는 인간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불멸에의 기도와 같다고. 20세기에 태어난 나는 4000년 전에 기록된 수학책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21세기에 태어난 이들은 짧디 짧은 인간의 수명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까. 불안이 거센 시절이다. 전혀 심각하지 않았던 옛날 옛적 질문이, 오만하고 자신만만했던 내 대답이 자꾸 떠오른다. 그 대답은 내게 아직 유효한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