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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93호 - 2021.가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평점 :
“지난 7월 19일 법무부는 브리핑을 통해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선언적 조항을 민법 제98조의2 1항으로 신설한다고 입법예고했다. (...) 동물이 물건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앞두고, 어느 보호소에서 복날 즈음하여 평소라면 입양이 거의 되지 않는 대형견 십수마리가 입양을 갔고, 그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 김지혜 [생명체는 물건입니까?] 창비주간논평 2021.8.4.
기억을 들춰보면 1990년 대 중반에 이미 동물권에 대한 논의 자체는 있었다. 학회에서 동물에게 ‘권리’를 주는 방식에 대해 상당히 세심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정치적 주체agent가 아닌 대상에게는 인간이 대리자가 되어 권리를 행사할 것인지 직접 부여할 수 있는지 등.
나는 내가 머무는 세상이 아주 작다는 것을 잘 몰라서 그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이 되는 줄 알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 역시 중요하다고 여겨줄 줄 알고 살았다. 그로부터 25년이 더 지나서 ‘이제 개를 먹지 말자는 논의를 할 때가 되었다거나’ ‘동물을 식재료로만 볼 것이 아니다 라거나’ ‘동물권 조항이 신설 입법 예고’가 될 지는 정말 몰랐다.
이런 속도라면 인간의 수명을 살며 생전에 변화와 개선을 목격하기란 참 귀하고 드문 일일 것이다. 확대되고 바뀐 법과 제도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무거워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담겨져 있는 변화인가.
개고기를 안 먹어봐서 맛도 효과도 모른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식품의 신비한 능력을 믿기보다는 해로운 물질을 하나라도 더 줄여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못 먹어 섭섭한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 몸은 개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콩 등을 구분해서 흡수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이 흡수할 수 있는 단백질의 최종 형태는 분해된 아미노산 형태일 뿐이다. 섭취 전 형태가 무엇이건 똑같다! 건강을 해치는 건 흡수된 아미노산이 아니라 추가 섭취된 여러 물질들이다.
“한국은 다채로운 육식 문화와 이에 대한 욕구를 실시간으로 실현시켜주는 배달 문화, 이를 뒷받침하는 축산업이 발달한 나라라는 점을 상기하건대 한국에서 동물권의 구체적 법제화와 실질적인 규제는 향후에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윤리와 도덕과 법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어릴 적에 이루어지면 좋은 점은 감수성이 함께 형성된다는 점이라고 한다. 우리가 판단을 할 때 자료를 모두 모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감정과 감수성으로 결정을 내릴 때도 있다. 나는 도가 지나쳐서 감정적 반응이 육체에도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형태가 분명한, 때론 살아있는, 대량의 육식재료들을 울부짖는 환호와 더불어 이로 찢어 삼키는 먹방은 자주 위통을 유발한다.
하지만 ‘동물권’을 논의할 때는 동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확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정치의 장에 동물을 어떻게 포섭하고 함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세계가 궁극적으로 생태적으로 재구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나는 아주 순전히 계산적인 이유로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축산업을 반대한다.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에 84배 정도 탁월한 메탄은 골칫거리다. 인간이 가축화해 산업자원으로 활용하는 ‘동물축산복합체’에서 배출되는 점점 더 늘어나는 메탄은 무시할 수 없는 양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육식만 줄이면 당장 해결 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논의는 이런 얄팍한 내 계산과는 다르게 포괄적이고 깊이 있고 구체적이고 법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 많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부정된 적도 없는 개발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관한 서양에서의 오래된 관념, 철학, 사상도 지적한다. 주로 동물과 인간의 ‘경계 설정’과 관련된 논의이다.
한국에서의 ‘반려동물’의 변화에 대한 지적은 반갑고도 유용한 분석이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한국인의 대표적인 반려동물들은 개와 고양이가 아니라, 소, 돼지, 닭이었다. 그러니 동요들에도 그토록 친근하게 등장했고, 문학과 그림에도 자주 함께 했다.
“가축을 좀처럼 볼 수 없게 된 것과는 반대로 돼지와 닭, 소의 고기는 너무나 흔해졌고 (...) 식을 줄 모르는 ‘먹방’ 문화 속에서 반복되는 허기와 과식은, 내가 먹는 것이 어떻게 지금 눈앞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겨를마저 빼앗아버렸는데, 생산지와 소비지의 분리야말로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고기를 소비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일 테다.”
저자도 독자인 나도 명쾌한 해법은 없다. 질문들이 가득할 뿐이다. 부디 의문을 갖는 일 자체가 유의미하길 바란다.
- 축산업의 문제를 비판하고 친환경 ‘동물복지’를 선택하면 ‘윤리적 도축’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자
- 육식 자체를 죄악시하는 이분법적 채식 담론은 타당한가
- 인간의 육식의 관습으로 인해 인간의 생활세계 속에 들어올 수 있었던 동물들의 거취는 어떻게 할 것인가
- 동물이 인간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지녀야 함을 목표로 삼는 것이 동물권 논의라며 가축들을 상품화하지 않고 도축 없이 보호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변명쟁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종종 하지만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넓히기란 참 어렵다. 이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현실 실천 가능한 방식은 ‘낭비’를 줄이는 것 - 과식과 음식쓰레기- 뿐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명들을 일단 '식재료'로만 보는 것도 조금 바뀌면 더 좋겠다. 무엇보다 먹방이 인기를 얻는 시대가 하루 빨리 끝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