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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양장) ㅣ 소설Y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평점 :
<나나>라는 대본 제목을 보고 ‘나나’라는 인물이 나올 거라 생각했으니 나는 무척이나 심층적 상상력이 부재한다고 봐야겠다. 잠시 내 상상 속에 등장했던 나나 대신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버린 십 대 두 명이 등장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 영혼의 실재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 존재가 쪼개지는 경험을 하게 된 걸까. 어린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내용을 모르고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살아있는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사냥하는 존재가 있다고 해서 처음엔 무서웠다. 평생 처음으로 영육이 분리된 황당한 상황인데 딱 일주일의 시간만 준다. 그 시간 동안 육체와 재결합에 실패하면 저승행이다.
그런데! 가장 소름끼치는 설정은 영혼이 빠져 나온 육체가 아주 멀쩡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후유증도 없고 의식도 또렷하고 아주 잘 산다. 심지어 그동안 영혼 탓에 멈칫거렸던 윤리적, 도덕적 고민을 하지 않아 거침없이 이익이 되는 지에만 관심을 두고 행동하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영혼 없이 살아요!” (...)
선령은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생각보다 많아.”
“영혼 없는 인사, 영혼 1도 없네, 영혼이 가출했네. (...)
뭐만 하면 영혼을 갈아 넣었대.
그렇게 쉽게 갈아 넣을 수 있는 거,
차라리 없이 살면 좀 어때?”
“영혼이 분리된 채로도 저렇듯 아무 변화가 없다니. (...)
영혼은 서랍 속 낡은 볼펜 같은 게 아닐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야말로 잡동사니 말이다.”
“주어진 환경에 맞게,
물이 흘러가고 달이 차듯이 살아간다? (...)
아무런 근심조차 없다는 뜻이잖아.
그럼 지금껏 영혼이 있을 때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뜻인가.”
“영혼이 없는 육체는
편법 앞에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단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외부의 요인들이 있지만 1차적으로는 가족과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다. 폭력과 학대가 만연한 그런 관계를 차치하고 표면상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외형이 유지된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으로 사는지는 보여 주지 못한다.
안타까운 점은 관찰력이 좋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크고 자신을 관리하고 가족의 행복에 기여할만한 성취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이기적으로 굴지 않아 많이 아프게 되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려 자신을 온전히 유지할 힘도 없이 영육이 분리되고 마는 것이다.
부모라고 해서 다 잘 하고 다 잘 알고 자식을 세세히 배려하고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일이나 어떻든 보호자의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시기의 아이들이니 부족한 점들은 부모이든 사회이든 방임이라 부를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삶은 저마다 무게를 지니고 있어. (...)
누구도 남의 다리로 땅을 디딜 수는 없어.
그 무게는 오롯이 혼자만의 몫이라는 뜻이지.”
“사실 너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상처도 마찬가지야.
부러지고 깨지고 다 벗겨졌는데도……
전혀 안 보일 때가 있어,”
“인간은 실시간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스스로의 것임에도 보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았다.
깊은 심연 속, 마음도 마찬가지다.
제 것이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
때로는 방치하고 모른 척한다.”
첫 인상과는 달리 무척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이다. 물론 마무리가 향해가는 방향이 그렇다고 해도 그런 분위기만으로 일상의 세세한 고민들이 해결되고 큰 걱정거리들이 사라지고 인간관계가 최선만을 위해 합의되진 않는다.
영혼이 분리되었든 재결합을 이루었든 육체를 가진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은 힘들고 어렵고 극적인 경험을 통해 이룬 자각은 시간과 더불어 또 다시 자기배반을 거듭할 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일 비슷하다는 말은 동시대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고래로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는 다른 듯 비슷하게 반복되었고 누군가는 해답을 구하기도 했을 것이지만 또 수많은 이들은 현실에 갇힌 채 답 없이도 생존을 유지할 기술만을 터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을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인간이란 본디 쓸데없이 복잡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한 생명체니까요.”
“인간은 느낌을 사실로 여기는 멍청한 오류를 자주 범해.”
“사람들에게 비극적 결말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데에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그 마지막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 때문이었다.”
그러니 영혼이 제 육체에 다가갈 수 없도록 결계가 쳐져 있는데 그 결계는 누가 왜 친 것일까. 영혼이 분리된 후 재결합하지 못하고 저승에 끌려간 영혼 없이 사는 육체가 사는 모습은 어떻게 변해갈까. 영혼 분리는 한번 겪으면 면역이 생기는 성장통과 같은 경험일까 아니면 일생 주의해야 하는 증상일까.
좋은 것, 바른 것, 옳은 것, 이상적인 것을 몰라 그렇게 못 사는 이들보다 알아도 변할 수 없는 이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얼마만큼이 제 잘못인지 따지고 싶지는 않다. 혹시 어느 순간 영혼이 분리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 해치우고 해결해야할 일이 끊이지 않을 때는 더구나 그렇다. 읽고 나니 야박하다 생각했던 일주일의 유예가 무척 다정한 제안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