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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질 - 그해 비가 그치자 조선에 역병이 돌았다 ㅣ 오늘의 청소년 문학 33
이진미 지음 / 다른 / 2021년 8월
평점 :
디테일이 닮지 않았는데도 표지를 보자 떠오르는 다른 작품이 있습니다. 사방에서 죽음의 손길이 덮쳐오는데 붉은 치마를 입은 홍이는 물 위를 걸어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감염병이나 괴질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시절을 살지만 역사소설은 늘 재밌고, 짜임새가 좋은 과정을 수렴하는 결론은 반갑고, 병이 퍼진 사회를 통해 드러난 인간의 면면을 타석삼아 읽는 일도 좋습니다. 신분제와 가난과 질병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희망과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 읽어 봅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양반으로 태어나소. 파리 목숨보다도 못한 천것으로는 태어나지 말고.”
“비록 약초꾼의 신분은 천하지만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귀한 일이다.”
“약초는 산신령님이 내주시는 건데, 아무렴 신령님이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신 거겠니? 가진 것 없고 천한 이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주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백성은 하늘이라면서요. 지금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데 가만히 계실 겁니까? 뭐라도 해야지요. 길이 보이지 않을 땐 길을 만들며 가야지요. 그것이 나리처럼 많이 배운 분들이 하실 일이 아닙니까?”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고 지역민 차별이 심하던 평안도 지역에 1821년(신사년)에 조선에 콜레라(호열자*)가 유입되어 퍼집니다.** 당시 사실들을 기록한 장면들이 기반이 되어 있어, 시대만 다른 질병관리청 보도를 접하는 기분도 듭니다. 기대 이상 접점들이 많아 놀랍니다.
* 호열자(虎列刺) 콜레라. 본디 중국에서 쓰는 '홀리에라[虎列剌]'의 우리 음 '호열랄'의 '랄(剌)'을 '자(刺)'로 잘못 써오는 말.
- "괴정!" 호열자라는 말이다. 모든 얼굴이 순식간에 빳빳해진다.
- 저 젊은 사공을 위해, 수년 전 호열자에 죽은 늙은 사공은 황천길을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소설 토지 용어인물사전 중에서
** 괴질(콜레라)’에 대한 첫 공식적인 기록은 1821년에 평안감사 김이교가 올린 상소문이며 하루에 수백여 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감염병이 퍼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 인터뷰 내용 중에서
미스터리물은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는 짜임새가 중요하고 가능한 생생한 묘사들이 긴장을 높이는데 역사도 아닌 국어 교사인 저자는 - 제 편견이겠지요 - 적어도 제게는 부족함 없는 완성도의 작품을 만나게 해주었네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부조리함과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사람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여 현실에 필적하는 이야기의 긴장과 재미와 감동을 만듭니다. 내가 사는 현실에서는 가능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긴 하지만, 한 편 이 모든 일들의 최전선에 버티고 막아 내는 분들을 다시 생각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가난한 약초꾼의 딸과 서얼 신분인 사또의 아들의 다르고 유사한 처지가 각각 당시 사회적 약자들을 대표합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뭐라도 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만납니다.
‘활인소’라는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관련 지식이 없어 잘은 모르는 동학사상의 창시자 최제우 역시 짧지만 등장하여, 현실의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고민하듯 대대적인 전염병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제안들을 합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이후 신분제 사회를 지양하고 만민평등 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우리도 코로나 판데믹에 더욱 극단적으로 갈리는 빈부격차와 차별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현대에 필요한 전망과 가이드는 무엇일까요.
살인범을 유추하는 것이 일차적인 재미이지만, 그 배경과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더 깊고 강렬하고 통쾌한 만족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국어 교사인 저자가 담아 낸 다양한 우리말을 배우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ㅋㅋㅎㅎㅇㅇ 등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절에 말과 글로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목격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씬스틸러: 검불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