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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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직후부터 이어진 지인들의 눈물바람에 당혹하고 조바심이 낫지만 두렵기도 한 마음에 미루다 이제 읽는다간신히 숨만 쉬도록 하는 통증을 동반하는 병증으로 잠이 오지 않는 나의 밝은 밤에 최고의 동반책이다.

 

나는 증조모를 단 한 번 뵈었다고 들었다기억은 없지만 사진은 남았다그 조우를 상상할 때는 늘 서로의 눈을 떠올린다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애정과 신뢰와 반가움을 담은 시선과 몸짓그렇게 기억하기로 정했다.

 

증조모조모모친나로 이어지는 100년이 넘는 책 속 이야기가 멀지도 남 같지도 않다다른 삶을 살았고 생각을 한껏 나눌 기회가 없어 결국엔 서로를 모른 채 헤어졌고 그러하겠지만우리는 타인일 수가 없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나도 그랬으니까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속에 여든에 가까운 증조모와 오십대 젊은 조모와 서른이 된 모친과 태어난 지 100일된 내가 있다사진은 늙지 않는 줄 알았더니 오십이 다 된 내가 다시 보는 사진 속 우리는 비슷비슷하게 닮아가며 나이를 먹은 느낌이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최초부터 최후까지 유전자를 추적할 수 있다는 모계로 이어 내려온 100여 년을 채운 삶이 회전한 듯 수평으로도 나란히 이어진다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느라 서로 맞닿은 몸들처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하면서 살아가겠구나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나는 통곡하지 않았다심장이 쿡쿡 통증을 분출했지만 이야기는 눈물바람보다 통쾌하고 서늘하게 멋지다수없이 잃었고 강해졌다책의 말미에 내가 받은 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앞을 헤집고 쳐 낼 다른 것이다밖은 어둡지만 살아 있는 모두의 용기로 마음은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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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블 망원경이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줬다천문학자들이 울트라 디프 필드’*라고 불리는 그 사진을오렌지빛보랏빛푸른빛흰빛을 내는 은하들이 검은 배경에 흩뿌려진 보석들처럼 보였다."


백삼십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그렇게 먼 옛날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맞아요.”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그 오래전 걸 어떻게 본다는 거야.”

그러게요근데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할머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네가 하는 일이 그런 거니?”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할머니가 망원경을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도 지금 태어났으면 너 같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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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모와의 비슷한 추억이 생각나서 읽다가 잠시 멈추었다.

퇴계 직계손이란 이유로 평생을 비녀와 한복을 착장하고 한 여름에도 버선을 벗지 않으셨던,

자손들에게 한 번 목소리 높여 야단도 치지 않으셨던 분.

어떤 무수한 생각들을 품고 질문들을 하며 사셨을까.

 

물리학과를 가고도 늘 천문학의 세계에 머물고 싶었던

자신과 너무도 다르게 사는 자손이 전하던 말들을 들으시며......

어쩌면…… 나와 같은 세대로 태어나셨으면

천문학자가 되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조선규방가사를 읽어 주시거나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기특하게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녹취한 자료들이 잔뜩 있는데

다들 살아라잘 살 거라.” 하고 돌아가신 후

육성을 들으면 열도 못 세고 울음이 터져 정리를 못하고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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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에 그애의 존재를 구겨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로 자신이 그애에게서 받았던 모든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없이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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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읽고 쓸 수는 있었겠지만, ‘백정’* 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사용해본 적이 없다사전을 찾아보니 한자가 이렇다. ‘’, 흰 것은 오랫동안 부재와 부정과 결핍의 의미로 사용된 색이었나 싶다백정백수... 예로 들건 두 개 밖에 없네장정이 아니다란 뜻그런 존재였다.

 

백정 白丁

 

2. 역사 고려 시대에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일반 농민을 이르던 말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다.

 

3. 역사 고려 시대에서인(庶人계통에 속하던 한인(閑人). 단독으로 정호(丁戶)를 구성하여 토지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한 사람의 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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