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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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읽었나 했는데 주인공 이름이 작가와 같다자전적이며 환상적이며 메타픽션인 이야기의 설정은 무척 촘촘한가보다.

 

쓰지 못할 때 나는 사회적으로 무()나 다름없다. (...) 글이 써지지 않는 나날이 하도 오래 이어지는 바람에 나는 종종 로빈슨 크루소의 처지를 생각하곤 했다. (...) 여름가을겨울 나라의 계절이 바뀌고 귀중한 인생의 시간이 허비된다.”

 

16년 전 우연히 발견해서 읽는 중에 사라져 버린 책 <열대>는 16년이 지나 <천일야화>를 읽다가 다시 생각이 났다며칠 후 참가한 침묵 독서회에서 아무리 찾아도 세상에 없는 책<열대>를 가진 여성을 만난다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초에 천일야화는 동양과 서양에 양다리를 걸치고 가짜 사본과 자의적인 번역이 뒤섞인마치 그 자체가 이야기인 듯한 기기묘묘한 성립의 역사를 지닌다그런 수상쩍음도 천일야화의 매력이다. (...) 요는 아무도 이 이야기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것이다.”

 

몇 장 안 읽었는데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이 <열대>인지 저 <열대>인지 또 다른 이야기인지 이야기 속 주인공 이야기인지 작가의 이야기인지잠시만 느긋하면 다른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일본 고교생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이라는데대단한 독자들이다다시 정신을 차려본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를 세상 사람들은 자연히 잊을 테지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잊혀갈 테고근대 문명은 폭주 끝에 괴멸될 테고언젠가 인류는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 테지그런데 눈앞의 마감에 무슨 의미가 있지?”

 

주인공인지 저자인지 내내 헷갈리는 인물이 "무인도 같은 공간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 어느새 저물녘이 되어가고 있었다"라고 묘사하는 대목에서 오늘 하루 책만 읽고 다른 날들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살 것 같은 내 삶이 겹쳐진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을 휴가를 신청했고 책을 읽고 쉬고 싶으면 여름휴가를 신청하며 살았다작년은 고통스러운 재택으로 얼룩져서 기억도 안 나고 올 해는 선택의 여지없이 독서 휴가인데, 8월이 되기 전에 8월 21일까지 업무 일정이 정해지는 바람에 그냥 살다 오늘 입추를 맞아 심술이 자라난다.

 

이런 날 왜 자꾸 합치되는 문장들만 눈에 띄는 건지……. “그 해 8월은 인생에서 가장 애매하고 패기 없는 여름이었다.” 어쩌면 오늘 읽기 완벽한 책을 읽는 중인지도 모르겠다읽어도 못 읽은 것 같겠다는 두려움이 스멀거리지만 저녁 생존 운동 시간 전까지 계속 읽는다아무튼 어째 잘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이런 식으로 내 기분과 소설 속 문장이 교차되는 듯해 소름이 돋는다.

 

1. 각자 수수께끼가 있는 책을 가져온다.

2. 어떤 수수께끼인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3. 타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건 금지된다.

 

이런 독서 모임 나도 하고 싶다내게 수수께끼가 있는 책이 있나그런데 같은 액자인 척 하는 다른 액자들이 도대체 몇 개인 건가시각과 뇌 사이에 정보 유입은 문제가 없는데 출력 기능에 착란이 일어날 듯하다.

 

인간은 원래 해석이라는 이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봅니다그런데 그 렌즈가 어떤 이유로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면 기묘한 세계가 나타나는 거죠그건 음모론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병적인 망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어느 쪽이든 그 세계를 보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렌즈가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지 않아도 인간은 동일한 제품이 아니라 각자 모두 다른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인지한 세계는 모두 다 다르다이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이런 뇌과학의 발견을 읽고 우리 모두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매 순간 싸우지도 않고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일까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합의는회의는협력은공동 작업은이 모든 건 다 기적 같기도 하고 오해와 망상의 일시적 수렴 같기도 하다이런 생각의 끝은 언제나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이다.

 

우리는 <열대안에 있다. (...) 과거에 <열대>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한 우리는 어느새 <열대>라는 세계 그 자체를 살기 시작해 각자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대단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그렇기에 제 <열대>만이 진짜인 겁니다.”

 

이야기를 발명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도 이웃도 친구도 공동체도 국가도 인류도 알아내어 살아 온 인류에게 이야기는 삶이고 삶 그 이상이기도 하다개별적인 삶은 유한하나 인류 전체의 삶은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그만큼의 불멸을 누린다.

 

6세기경 구두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모아 8세 말 경에 아랍어로 번역 기술된 작품이 <천일야화>이다이 한 작품이 형태를 갖추는 데에 이미 인간의 가장 오래된 수명을 훌쩍 넘었다그리고 2021년에도 살아 곁에 있다나는내 삶은 어떤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이야기의 일부가 될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태어난 장면을 여전히 가끔 묻고 듣고 싶어 하는 꼬맹이들 생각이 난다처음 들려줄 때 엄청나게 재밌고 신나는 이야기로 각색해 줄 것을 너무 정직한 정보 전달에만 집중해서 이후에 어떤 변형도 용납하지 않는다그래도 같은 이야기 듣기를 무척 좋아하니 매번 또 신나게 들려준다.

 

자신이 기억하는 삶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살아남았고 남이 기억하는 삶은 그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열대속 <열대>를 만나 한참 전에 길을 읽고 그것도 모른 채 놀다 온 기분이지만 어쨌든 작가가 7년을 공들여 적은 글자는 다 읽었다.

 

당신이 살기를 원하듯 우리 또한 살기를 원합니다이 이야기가 마지막 이야기꾼에게 전달되어 내 소원이 성취되기를!”

 

내 이야기도 아직은 끝나지 말라고 이제 시시한 운동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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