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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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생의 일처럼도 느껴지는 여러해 전 독일 프라이브루크Freiburg에서 티티제Titisee-Neustadt를 거쳐 스위스 바젤Basel로 가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12월이었고 눈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빛나고 있었다독일의 검은 숲Schwarzwald을 이루는 모든 나무들이 눈으로 포장되어 빈틈없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심코 풍경에 눈을 두다 기이한 느낌이 소름처럼 온 몸을 관통했다본체도 이름도 완벽하게 가린 모두 눈에 쌓인 세상이 문득 비현실적이고 낯선 무서움으로 해석되었다눈이 한 가득인 저 장소들은 인간이 이미지화 시킨 것처럼 포근하지도 안온하지도 않으리라숲 속의 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나서지 못하리라.

 

눈 아래 세상은 전부 다른 색을 띠고 있지만 눈 덮인 세상은 어디나 비슷한 결로 망해 가고 있다는 것. (...) 이 재난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힘이 나는 것이다.”

 

기차가 지나쳤듯 그 느낌을 잊고 내내 도시의 편리함과 풍족함을 누리고 살았다가능한 낭비하지 말고 환경 부담이 덜한 방식으로 살자는 지적 동기는 있었으나 일상은 그에 맞지 않는 시스템에서 생산된 것들로 포화상태였다그리고 다 함께 코로나 판데믹을 만났다.

 

기온이 낮을수록 바이러스 생존력이 강해진다기에 따스한 봄이 오면 혼란도 질병도 기세를 잃으리라늘 그렇듯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해결해 주리라불평불만을 내뱉으며 조금만 더 견디면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느긋하게 믿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날의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겼다아니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눈앞에 닥친 비극과 재난의 징조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려는 몸부림이었다이해가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사건 같은 건 일상을 영위하는데 불안을 가중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애써 기억을 뒤져봐도 2020년의 봄은 떠오르지 않는다준자가격리자처럼 집안에 머물며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기온은 매일 오르는데 바이러스는 왜 사라지지 않는지 화가 났다그리고 상황은 악화되었다. 2021년 봄은 왔고 바이러스는 여전히 상주 중이었다지금여름 폭염 속 인간 사회는 변이 실험을 위한 최적의 배양실이 되었다일상은 돌아오지 않는다그래서도 안 된다살던 대로 살아 이런 꼴을 당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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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지구를 통째로 박제해 버릴 심산인 듯했다언제 어느 곳에든 하얗고 반짝이는 방부제 가루가짜 눈이 있었다빌어먹게도 예뻤다.”

 

티티제에서 만난 가장 사랑하는 눈내리는마을 스노볼을 옆에 두고 폭염 주의 문자를 받으며 <스노볼 드라이브>를 읽는다조금은 반가웠던 서늘한 감촉의 눈이란 단어는 실리카겔이란 정체를 알자 한 여름에 닥친 재앙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우리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것들그리워하던 것들이 현실만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조차 변형되고 변질되는 것이 서글프다.

 

떠오르는 것이 없다아무것도정말 아무것도항상 당장 코앞의 현실을 감당하기도 벅차서 먼 미래는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나중을 계획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어차피 세상에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몇 없다하다못해 이런 세상에 눈뜨게 한 가족조차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 중 내 의사가 반영된 게 있기는 할까.”

 

모든 문장에 마음이 따갑고 쓰려 당혹감이 든다어쨌든 기성세대인 나는 아이들이 이런 말을 퍼부으면 내 자식들이 아니라도 이런 세상을 넘겨 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할 말을 못 찾을 것이다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하며 묵묵히 살면 된다고 면죄부를 주며 살았다희생은 싫었다감당할 수 있는 소소한 것들만 감당했다.

 

죄책감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서 자꾸만 이월을 다그치게 된다발바닥에 박힌 유리조각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를 아프게 찌른다빼내려면 바닥에 주저앉아 내 가장 밑바닥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잘 빠지지도 않는다그렇게 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 곯아갈지도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마스크하고 외출을 한마스크로 덮인 얼굴들을 보고 자란맘 편한 외식도 여행도친구들과의 놀이터도 학교도 박탈당한 아이들은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마음을 품으며 자라고 있는 것일까온라인 수업을 하는 초등생 꼬맹이의 조그마한 등이 서러워 볼 때마다 눈물이 슬쩍 차올랐다.

 

이 책에서 보호자인 이모가 상징적이게도 스노볼만을 남긴 채 드라이브 도중에 실종되고 남은 아이들이 재앙을 처리하는 눈소각센터에서 일하는 장면은 현실을 책임지지 못한 어른들의 실질적 부재와 그래도 살아서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로서 아이들을 바라보게 한다.

 

어른들은 왜 항상 아이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걸까알려 주는 것 말고는 알려 하지 말고보여 주는 것 말고는 보려 하지 말고들려주는 것 말고는 들으려 하지 말라고그래 봤자 애들도 다 안다다 보고 듣지. (...) 그들이 왜 폐기물이지하루는 내 친구였는데친구와 폐기물을 나누는 기분은 무엇인지.”

 

현실의 어른들은 비겁하게도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눈을 돌리고 감고 온갖 합리화를 하며 우아하게 살다 아무 변화도 마중하지 못하고 시시하게 삶을 마칠지 모른다많이 알아 영리하게 군다고 생각한 어른들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돌발과 예측 불허의 미래에서 아이들이 반증해주길 바란다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지 말고정확한 과학적 상상력으로 가려진 덮인 면면을 들춰 가면서.

 

모루는 여행이 끝나면 사진을 주겠다 했지만 나는 이 여정에 목적지 따위가 없으면 좋을 것 같았다목적지가 있는 여행은 지루하니까. (...) 꼭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까지 단단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이름의 모루와 내내 염원했던 봄의 이월이 서로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서사가 귀하고 흥미롭고 애틋했다상대의 믿음의 근거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침묵을 선택할 줄 아는 넉넉한 배려가 뭉클했다내가 믿는 것보다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귀하게 여기는 시선이 깊고 아름다웠다.

 

작품을 읽기 전에 불결하고 불안한 시절과 닮은 글을 읽는 일이 즐거울 리 없다고 생각해서 한참을 망설였다떠날 수 없는 사람들재난에 가장 먼저 고스란히 노출되는 이들의 삶은 판데믹 이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사회의 경계선으로 더 촘촘히 밀려날 뿐이니까.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능력도 힘도 없지만 함께’ 하는 것은 여전히 힘이 된다고 믿고 싶다서로를 향한 응원과 연대가 희망의 정체라고 그렇게 믿기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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