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평점 :
다시 태어날 땐 꼭 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식물학자를 만나게 되면 행복하겠다. 읽기 전에는 세밀화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가 컸다. 읽고 난 후 마음 깊숙하게 파고든 것은 저자의 글이었다.
“저는 아름답다거나 경이롭다는 것 이상으로 식물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식물의 입장에서 살아보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햇빛과 비를 맞으며 들녘에 홀로 서 있는 것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짝반짝 표면을 보고 찬탄하는 것보다 식물의 형태, 분류, 계통, 진화, DNA, 게놈까지……. 샅샅이 알고 사랑한 시선이 모두 글에 담겨 있다. 누구라도 이토록 전면적으로 만나 본 적 없어 감동 후에 죄책감이 든다.
거리의 나무들은 폭력적인 손길로 잘려 나가고 살해되는 장면을 어떤 공포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처참하게 느끼며 산다. 할 수 있는 항의를 기회가 닿는 대로 해보았지만 반백년 가까이 산 지금까지 그 일은 여전히 어디서건 반복된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과 산업에 비해 식물군의 죽음이나 반려식물의 사망에 대해서는 참 무감하다. 교감보다는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효용성에 오롯이 집중한다. 그런 분위기가 못내 서운하니 식물을 살뜰하게 담아 내 눈에 넣어주는 이 책은 귀하고 고맙다.
“천지개벽 같은 환경 변화라도 그것에 맞춰 혁신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겠지요. 또 옛것을 간직하면서도 새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혜와 유연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우리 인간보다 더 오래 지구에 살고 있는 고사리가 알려주는 장수의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국 유학 중에 국립공원에 필드워크를 나가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고사리가 나무만큼 자라 숲을 이룬 풍경이었다. 거대 공룡들의 먹이가 되었다는 교과서 구절이 비소로 납득되었다.
고생대부터 남극과 사막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살던 나무 고사리들의 화석이 그토록 선명한 것도, 현재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는 것도.
고사리나물이 아니라 고사리라는 생물을 처음으로 직면한 순간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이 ‘식물이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그 말을 믿는 나는 그 이야기들을 정성스레 기록한 저자의 마음을 자꾸 헤아려보고 싶다. 그림과 내용에 떠들썩하게 감탄하기보다 식물의 이야기를 제대로 헤아려 듣기 위해 필요한 눈, 귀, 마음을 궁금해 해본다. 그러다보면 이 책을 통해 만난 모두가 애틋해서 눈물이 쑤욱 차오른다.
“기생식물을 보다보면 (...) 식물의 진화가 식물들의 본성을 뛰어넘을 정도까지 가능하다는 것인데요. 식물의 본성인 광합성 능력까지도 버릴 수 있게 진화해온 것이지요. (...) 어쩌면 지구상의 수많은 식물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며 진화해왔고,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현생의 인간으로서 나는 마지막까지 인류도 사회적 진화를 할 수 있다고, 제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 삶을 제대로 보살필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인간의 과학적 상상력은 결국에는 올바른 해법을 찾아내었다고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다 어느 날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결합이 끊어지고 또 다른 어느 날 어떤 섭동에 의해 다시 뭉치게 된다고 그때는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어딘가의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저자의 말처럼 ‘햇빛과 비를 맞으며 들녘에 홀로 서 있는 것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
그때도 내가 사랑한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잘 살아 남아서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알아가고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상상을 놓치지 않고 여생을 살고 싶다. 이 책에서 만난 ‘할 수 있다’고 소곤소곤 귀에 들려주는, 토닥여주는 저자의 글을 남긴다.
“식물은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시간에 꽃을 피우고, 삶의 다음 고리로 연결해갑니다. 사람도 저마다 꽃을 피우는 시간이 다를 겁니다. (...) 중요한 건 일찍 꽃을 피우는 것보다 나에게 맞는 시간에 꽃을 피우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아닐까요? 꽃이 피는 시간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