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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놓아줘 - 디그니타스로 가는 4일간의 여정
에드워드 독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달의시간 / 2021년 7월
평점 :
제목이... 슬프지만 여전히 발화의 주체를 손의 주체로 두고 있어서 좋다.무슨 이야기인가 하시겠지만 부제 - 디그니타스로 가는 4일간의 여정 - 의 디그니타스에 대해 알고 계시거나 알게 되시면 짐작이 가능하실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디그니타스는 실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안락사 지원병원이다. 그러니 제목과 부제만으로 이 작품의 주제 의식 또한 짐작하실 것이다. 내 죽음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놓아줘’라고 청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 사이의 이야기들이다.
“생명만이 진정한 기적이자 가장 큰 신비일지도 몰라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아버지가 들이쉴 수 있는 숨이 열 번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그래도… 아버지는 끝까지 그 숨을 쉬어야 해요.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모욕이니까. 생명에 대한 모욕 그 자체니까요.”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언제나 지금보단 좀 더 존엄하게 존중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판데믹 이후 질병을 이유로 차별과 혐오가 가시화되니 더 관심이 간다. 다른 나라 일이긴 하지만 어떤 죽음은 사회적 혼란과 의료 위기 속에서 감당하기 어렵게 취급되고 만다.
얼마 전에 우연히 미국 워싱턴주에서는 조력자살이 불법이 아니라 말기암인 부모들이 자식들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뢰하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을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자식들의 심정을 짐작해보면 어떤 일일까 막막해졌다.
“부모의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가장 사적인 일이라는 거지. 왜냐하면 그 관계는 바로 네가 어렸을 때로 돌아가니까. 어렸을 때의 그 기억으로.”
태어난 직후 매일 살고 있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 그렇다면 죽음을 택한다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내 삶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여행에 좋은 점이 있다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우리가 함께 살아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끼고 있다는 바로 그것일 거라고. 진정으로 함께 사는 것처럼 살아 있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기피하고 부정하다 홀연히 갑자기 닥치고 당하는 죽음도 있겠고 원하는 방식이 그것이라면 그 또한 선택일 테지만, 좀 더 다양한 입장에 처한 이들의 다양한 선택을 들어 보는 일은 아마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을 선택할 방법이 있어 어쩌면 그조차 특권인, 다행인, 운이 좋은 이들의 여행에 나도 동참해본다. 인생의 마지막에 나누는 대화들은 무엇일지, 죽음이 가까워서야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는 기분이 든다는 분들도 계신데, 각자의 삶이 겪어낸 서사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우리가 단 한 번 사는 이 삶은 아주 짧아, 얘들아. 그게 내가 너희에게 전하려고 애쓰는 말이야. 단 한 번의 아주 짧은 생이라고. 그러고 끝나버려. 우라지게 빨리 끝나버린다고.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지. 하지만 우린 잊어버리지, 잊어버린다니까.”
쉽고 편하고 차분하고 다정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 마음을 단단히 했다. 간혹 에세이로 착각하며 읽을 소설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했다. 혹시 이 책을 읽고 내 삶 자체를 톺아보고 뭔가 실제로 바뀔 지도 모르겠단 두려움과 기대도 공존했다.
골치 아픈 가족관계, 애증의 대상인 아버지, 루게릭병 판정을 받은 아버지와 세 아들이 안락사 지원병원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들 사이에 폭발할 누적된 에너지가 언제 어떤 형태로 터질까 읽으면서 불안불안 겁이 났다.
“ 다들 미친 듯이 서둘러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수백 대의 차가 지나갔다. 죽으러 가는 건 아니고. 사실, 죽으러 가는 것이기도 했다.”
뜻밖에 어쩌면 당연하게도 죽어가는 아버지가 가장 생기 있게 느껴진다. 한편으론 얼마나 홀가분할까 부럽기도 하다. 정말로 지금, 여기, 현재를 만끽할 수 있는 이는 아버지밖에 없지 않을까. 내 주위의 사물들, 아름다움들,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의미.
주제를 파악하고 교훈을 챙기고 하는 행위가 참 약삭빠르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편지글에 담긴 내용들은 쉽게 그치지 않는 감동이었다. 일상에 대해서는 따뜻하고, 문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종교에 대해서는 깊이 있고, 모든 문장의 곳곳에는 위트까지 번져있다.
“아버지는 인생이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즉 그것이 호모사피엔스, 인류를 위한 모든 이야기라고.”
“아버지는 몰랐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 자신의 인생으로 내게 가르친 것, 내게 가르친 것은 가끔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그냥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 아마도 우리를 데려온 건 잔인한 일일 것이다. 아마 아버지는 대단히 용감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겁쟁이일 거다.”
- 나는 놓아 달라고 청하는 내 가족 누구의 손이라도 놓아줄 수 있을까...
- 놓아줄 수 없다면 왜 그런 걸까...
- 만약 그들이 치료제도 없이 앓으며 지독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남은 시간 경험할 것이 그 뿐이라면...
- 내 가족이 아니라 내 경우라면...
디그니타스 병원은 안락사 지정 병원 중에 유일하게 외국인을 받아 주는 병원이다. 1988년 설립 후 2014년까지 96개국에서 7764명이 안락사를 신청했다. 그 중 한국인은 1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