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하나만 막고 올게
임태운 지음 / 시공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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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같은 것을 싫어한다는 공감을 나눌 때 더 가까워진다고 하는데나는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부분적으로는 함께 경멸당한 세월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고 학창시절엔 과학자가 되는 일이 곧 애국자가 되는 일이란 분위기 속에 자랐다그런데도 문학에서의 SF는 공상과학이란 천박한 번역 탓인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갖가지 과학기술을 산업과 일상에 들여오는 일에는 아주 열광적이었으니 이런 모순적인 괴리는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어쨌든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문학 자체도 대접을 잘 받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이젠 그럭저럭 이해는 한다.

 

지금은 SF문학이라고도 불리고계간지도 있고특집으로도 다뤄지고영상화도 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평가는 너그럽지 않다아마도 SF란 퀴어와 페미니즘과 더불어 늘 젊은 소수의 영역일 지도 모르겠다이변을 일으켜 흥행몰이를 한다는 기사의 소재로 가끔 활용되는.

 

지금쯤 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책은 SF 단편집이다작년에 <화이트 블러드>를 무척 재미있게 읽고 신간 소식을 기다리던 작가 임태운의 작품이다장편이 좀 더 본격적이고 묵직하고 서사가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면 단편들은 훨씬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고 재미있고 강렬한 가능성이 크다.

 

거의 매일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에 지지 않도록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으로 지치는 날들에 반가운 아군처럼 느껴지는 책이다표제작 <종말 하나만 막고 올게>를 당연히 가장 먼저 읽는다.

 

막장 드라마처럼 익숙하지만 불안하게 전개되더니 그야말로 SF적 급반전한동안 웃느라 잠시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뭘 적어야 스포가 안 될까 너무 고민 되어 가능한 안 적기로 한다너무나 일상적이고 웃기고 유쾌하고 뭉클하다최고다.

 

정말로 남편에게 외도 상대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울반점>은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몰라 감상이 부족할까 긴장하며 읽다가 누군가의 향수가 듬뿍 느껴지는 이야기에 에세이인가 싶다가긴장 덕에 머리가 아플 시점에 빵 터지는 사건이 생겨서 아주 재밌게 즐겁게 읽었다불량식품을 먹으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듯한 시간이었다방심하면 아주 많이 웃게 된다영상화 계약이 되었다니 결과물이 무척 궁금하다.

 

새로 생겼다는 저 중국집에서 뭔가 불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야.”

 

<궁극의 몸>은 작가의 데뷔작이고 3시간 만에 쓴 작품이라는데 시의적절한 소재라 현실 밀착적인 기시감을 느끼며 깜짝 깜짝 놀라며 읽었다인류가 바이러스로 이런저런 신체 변형을 겪는다마치 공고한 사회 계급제도를 넘어서는 일은 질병에 의한 막을 수 없는 변형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어둡게 던지는 것도 같다생각이 차분해지지만 좋은 작품이다.

 

제 오른쪽 검지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던 작품이지만프레데터와 드래곤볼을 모두 보고 읽은 경험 덕인지 의외로 깔깔 거리며 공감할 수 있는 조롱들을 많이 알아 차렸다그나저나 정말 이런 소재와 전개로 강요된 모성애 이야기를 다룰 줄 몰랐다천재!

 

나는 강해지기 위해 어머니가 된 건지어머니가 되는 바람에 강해져 버린 건지.”

 

<레어템의 보존법칙>은 정말 못 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작품이었다게임에 열중한 바가 없어서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로봇이라서 다행이야>는 제목이 무척이나 친근하고 분위기도 막 따뜻해지는 바람에 감정의 방향을 틀어 적응하면서 차분히 읽은 작품이다인간의 상상력이비극을 막기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의도가 이렇게 슬프고 잔인한 목적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내다니... 인간으로서 당황했다.

 

그런데 또... 이런 우정...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춰야 하는지다른 존재를 자체로 존중한다는 건 어떤 말과 행동과 태도여야 하는지... 어려서 못했던 잘못했던 할 수 있었지만 덜 했던 모든 시간들이 후회되고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작품이었다.

 

비밀은 충치 같은 거야.”

 

영상화된다면 가장 먼저 보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다망치지 말아 주세요부디!

 

우리의 현실에서는 종말 하나 정도 막아줄게하는 누군가가 있을까.

당면한 위기 말고 이미 오래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여전한데 기억하고 있을까.

작가가 살뜰하게 담아 준 차별과 갈등과 범죄와 혼란을 웃다 울다하며 삶을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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