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 방송가의 불공정과 비정함에 대하여
이은혜 지음 / 꿈꾸는인생 / 2021년 7월
평점 :
어제 2부를 읽다 속이 아파온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이유를 찾기도 하고 다른 책들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다시 책을 펼치니 희한하게 다시 아프기 시작한다. 당사자가 힘든 이야기를 용기 있게 전한 책을 읽는 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난감했다. 그래서 그냥 계속 읽기로 했다. 저자는 혹 답답할 지라도 완독하라 응원해 주셨고, 그 이전에도 나는 별 힘은 안 되어도 읽고 같이 계란은 던질 수 있다 의견을 남겨 둔 바가 있다.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야기’, ‘어딜 봐도 우아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를 찾을 수 없었던’, ‘계약서도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을 인정받지도 보장받지도 못했던’ ‘가장 따뜻한 조언은 도망치라! 는 말이었던’ ‘갈라치기로 고용과 해고가 정규/비정규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던’ ‘쓰고 버려지던’ ‘매달 잉여인간인가 아닌가로 고뇌하게 되던’ ‘꿈꾸던 일인데 기쁨보다 마음이 쪼그라드는 슬픔을 전하던’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면 하는 일’, 방송국 작가로 살았던 저자의 경험이 여기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리학을 전공한 나는 ‘원래’라는 말은 과학에서 추방해야할 표현으로 배웠다. ‘원래가 어딨나?’를 늘 묻던 교수님이 계셨으니. 결이 달라도 나는 어느 분야에서든 ‘원래’라는 말의 실존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은 필요한 누군가의 구성품일 뿐이다. ‘원래’가 어떻게 얼마나 폭력적인 언어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문장들로 다시 선명히 배워 본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은 기득권의 언어이다.
논리와 혁명에 대응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다.
‘원래’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여성들은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고,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아야 했을지 모른다. (...)
방송작가는 원래 휴가가 없다는 말의 ‘원래’를
프리랜서는 원래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는 문장에서 ‘원래’를 뒤집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
가족주의, 연령주의 표현들이 꽤 많이 사라지지 않았나 싶었던 느낌은 내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둔감하고 편해진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잊고 물러서는 일은 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진다. 다시 조직 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언어로 최면을 걸 듯, 가스라이팅을 하듯,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예를 들어 ‘이은혜 작가’에게는 시킬 수 없는 담배 심부름을 ‘막내’에게는 시킬 수 있다.
이 고릿적 단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누군가를 손쉽게 부리기 위해서다.
호칭은 이렇게 힘이 세다.”
여러 해 전이지만 심지어 상대측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사과하는 일을 좀 더 분명히 항의하다가 그쪽 사람의 거센 역공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차분히 할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학교 후배이지만 사회 선배인 친구가 매운 지적을 했다. 피해자임에도 여성은 이런 경우에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조곤조곤한 태도를 잃지 말고 상대의 심사를 살피며 말을 이어나가는 배려를 해야 하는 것이냐고. 이 책에서 배운 방송가의 면면들을 보면 이런 태도와 묵직한 강요는 바뀌거나 없어진 것이 전혀 아닌가보다.
“늘 약자만 미소와 다정을 강요받는다. 문제 제기를 할 때조차 상냥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 싫어하시거나 저를 미워하실 지도 모르지만 - 내내 무척 상냥하다. 적어도 글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이는 저자가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 행동해 주는 선배’, ‘방송사에서 작가로 10년을 일한 도인’이 되었기 때문일까. 심지어 이런 문장을 읽을 때조차 날카롭고 서늘한 느낌보다는 다정하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속이 아프다. 책 읽고 쓰기가 원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동감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개인적인 통렬함보다 이런 몹쓸 세계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구나, 줄어들지 않았구나, 하는 울화와 일종의 좌절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잘 아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꿈을 펼칠 정확한 장소에 도착하고서도 성취와 실현과 즐거움과 행복 대신 쓰이고 버려지는 이들의 실제 상황이 끔찍하고 무척 아프다. ‘하고 싶은 일도 잘 하는 일도 아닌 할 수 있는 일’을 해치우며 사는 독자로서는 더 안타깝고 속이 상한다.
“다시 돌아갈 곳 없는 사람만이 업계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걸까.”
춥고 슬픈 문장이다. 저자가 자신을 전직 작가라고 하는 것이 슬퍼 눈물이 차오르고 마르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방송가의 부조리함을 이제야 밝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니, 이번에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죄다 어디 가고 고민하고 용기를 내는 사람만 부끄러워하는 걸까, 속이 더 아파온다. 이미 잘 아실 지도, 적어도 나보단 잘 아실지도 모르지만 경애하는 김중미 작가의 이야기를 이 글에 담아 본다.
“지우는 내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 착한 사람들이 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게 문제이긴 하다. 그래도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 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곁에 있다는 것>
독자로서 나는 사람을 너무 잘 믿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든 듣고 읽고 쓰고 계란 정도는 언제든 함께 던질 거라 말씀 드리고 싶다. 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나도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