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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받을 권리 - 팬데믹 시대, 역사학자의 병상일기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강우성 옮김 / 엘리 / 2021년 6월
평점 :
몇 달 전 친구의 권유로 못 읽을 것만 같던 <피에 젖은 땅>을 함께 읽었습니다. 힘들었지요. 분량 때문이 아니라 참상을 가감 없이 치열하게 전하는 내용을 읽어 내느라 그랬습니다. 울며불며 읽은 덕분에 나치 범죄에 대해 제한적이었던 오랜 이미지를 깨고 더 확장된 사실을 비로소 배우게 되었습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타협이 없는 저자입니다. 시선이 문제의 본질에 바로 가 닿는 그런 분이라 느낍니다.
“내 분노는 어떤 것에도 향해 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없는 세계에 분노했다. 나는 분노했다, 고로 존재했다.”
일견 책 제목과 역사학자인 저자가 함께 하는 책이 낯설어 출판사에 제공하는 책소개를 읽어 보았더니 본인이 맹장 수술, 패혈증, 간농양을 겪으며 자신이 경험한 미국 병원의 응급실 상황과 민영 의료의 문제점들에 대해 기록하신 책이라 합니다.
존경스럽지만 염증과 수술로 의식을 차리기도 힘들게 고통 받고 고생하셨을 것인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란 생각에 숙연해 집니다. 학자이자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윤리에 대한 의식이 본질을 이루는 분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내 삶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이 떠다니는 깨달음, 이 다정한 공감이 나를 호위해 죽음에서 멀어지게 했다.”
조금만 번거로워도 타협하거나 미루거나 적당히 참여하고 마는 제 선택과 일상이 무람해지는... 전작을 읽을 때에도 느꼈던 열심이지 못한 삶에 대해 변병의 여지없이 수치심을 조금은 느끼게 됩니다. 이런 좋은 책을 번역 출간해 주셔서 편하고 쉽게 읽게 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선의를 향해 나아갈 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일부가 바로, 모든 인간은 질병에 걸릴 수 있으며 평등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국민의료보험제도가 훌륭하고 잠시 논의를 탔던 의료민영화를 잘 막아낸 대한민국 시민들로서는 낯선 이야기일 수도 경악할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코로나로 부가된 억대의 치료비 소식과 더불어 오래 전 기자인 친구가 워싱턴 일 년 파견 갔다 장파열로 수술을 한 이야기를 들어 완전히 낯설진 않았습니다. 일차 수술에 9천만 원이 넘게 비용이 청구되어 꿰맨 배를 부여잡고 한국에 들어와 2차 수술을 받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도 미국 사는 친구들 얘기를 들으면 의료보험 적용 대상들이 직장 보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운 나쁘면 팔 골절로 6백만 원 정도 청구 당하기도 한다고...
“지금까지 15만명의 미국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었다.”
“누구나 최소한의 비용으로 적절한 의료보장을 누릴 수 있어야, 동료 시민들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이 더 쉽게 가능해진다.”
“자유를 추구할 권리에는 의료보장의 권리가 포함된다. 병에 걸리면 자유롭지 못하다. 통치자들은 우리의 고통을 포착하고, 우리에게 거짓말하며, 우리의 다른 자유마저 빼앗아 간다.”
흐릿하고 짐작하기 어려운 미래, 돌발을 멈추지 않는 불안 요소들, 함께 힘을 모아 대처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익집단들의 갈라치기……. 언제나 어려움은 있겠지요. 적어도 권리가 제대로 보장 받고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당하지 않으며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삶 자체가 망가지지 않는 사회 안전망이 마련된 시절을 아이들이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얼마간 안심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이상할 만큼 강렬하게 다른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약해지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늘 인류와 역사와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던 학자인 저자가 당사자가 되어서야 약해진 사람들과 비로소 동질감을 느꼈다는 고백은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저자의 기준에 합치한 수준으로 비로소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품격 있는 판단이겠지요.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 각자가 견디고 버티는 일상에서 지치고 힘들어도 문득 타인의 그늘을 살펴보고 할 수 있는 위로를 건네는 일을 무감하지 않게 기억하고 싶어지는 단정하고 냉철하고 뜨거운 책이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