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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가지 질병으로 읽는 세계사 - 소크라테스부터 덩샤오핑까지, 세계사를 움직인 인물과 사건 속에 숨은 질병과 약 이야기
정승규 지음 / 반니 / 2021년 5월
평점 :
‘질병과 약’이라니 시의적절해 보이기도 하고, ‘약’이란 언제나 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양면성이 있으니 안타깝고 무섭긴 하지만 이야기로서는 흥미로운 ‘독약’과 독살에 관한 사적 이야기들도 기대되었다.
빈약한 상상력이라 거의 대부분의 신간들은 내 기대쯤은 훌쩍 뛰어 넘는다. 역사, 예술, 정치, 사회, 과학 모두가 어우러진 재미난 책이다. 이 책을 특징짓는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의 직업이 약사라는 것이다. 아주 익숙한 세계사의 사건들에 의학을 적용해서 새로운 해석을 한다.
“어릴 적,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 수십 년 동안 역사책을 읽어오면서 느꼈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약간 차이가 있다면 질병이나 약을 키워드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사로 분류되지만 유럽사만 다루는 섭섭한 구성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 즉 동아시아를 함께 다루고 있어서 비로소 세계사라는 흐름에서 근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해볼 수 있는 멋진 효과도 있다.
다양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생겼던 일들, 특히 세계사를 움직일 위치에 있었던 이들과 그들이 겪은 질병 관련 이야기들이 아주 재밌는 대부분 10쪽 남짓한 이야기로 25가지나 담겨 있다. 그냥 재밌게 읽으시면 좋을 사전지식도 많이 요구하지 않는 흥미로운 옛날이야기들이다.
재밌는 것은 읽다보면 질병과 약이 세계사를 구동하고 전환하는 유일한 동력처럼도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몰입이 쉽고 새로워서 좋고 설득력도 강하다. 모범생처럼 차례로 읽어도 관심이 더 가는 내용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병에 걸려 투병하는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질병, 약, 독이 세계사에 미친 역할, 관련된 혹은 파생된 흥미로운 사건들이 다종다양하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대결과 죽음과 자살과 살해가 등장한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언급되어 반가웠다. 그 역시 1차 세계대전 때 약국에서 일했고 자신의 작품에 쓰일 독약에 대한 연구에 심취했다. 소설 속 범죄 수단으로 사용된 청산가리는 현실에서도 자주 애용(?)되었다.
나치집권자들이 청산가리를 사용해 자살한 것이나 르네상스 여성들이 비소가 섞인 화장품을 사용하다 본인도 죽고 남편이나 애인들도 죽인 이야기, 또 그 점을 이용해 계획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이야기도 소개된다.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성병의 치료제로 수은을 복용했다고 하니 누가 퍼트린 약학 상식인지는 몰라도 성병을 죽은 이들보다 치료제로 죽은 이들이 더 많았을 듯하다. 슈베르트, 고갱, 모파상, 알퐁스 도데, 보들레르, 슈만 등등...... 낭만주의 시대란 시대명과 불화하는 죽음의 시대이기도 하다.
불만족스러운 면이 많지만 현대 사회가 엄청난 문명화와 진보를 이뤘다는 실감이 드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아닌가, 얼마 전에도 사람들이 독살되었던가.
이전에 다른 책에서 만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특허등록 없이 인류를 위해 제조법을 무료로 공개한 조나스 소크라는 의사도 다시 만나 반가웠고, 기독교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이 모성애와 신앙을 방해한다고 믿어 사용을 꺼리던 것을 영국 여왕이 마취제를 사용해 분만하면서 사라진 이야기는 통쾌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증과 모성애에 관한 속설이 있었던 듯한데 기억이 안 난다. 끔찍하게 가학적인 사고방식이다.
무려 2020년에도 독감백신과 고로나 백신에 대한 가짜뉴스들이 기세를 떨쳤으니 다 옛일이라고는 못하겠다. 주제에 따르는 주요 내용 이외에도 재미난 부분들이 눈에 잘 띈다. 어쨌든 전혀 지루하지 않은 재미난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