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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앨런 홀링허스트Alan Hollinghurst의 첫 소설이 <수영장 도서관>입니다. 시대적 배경은 무려 대처 수상 집권 말기인 1988년입니다. 영국 런던이지만 어둡고 어려운 시기일 거란 짐작이 듭니다. 작가의 첫 소설이니 특히 더 농도가 짙고 자전적 밀착도가 최고조일 지도 모릅니다. 강렬한 감정의 파고가 높을 것 같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용기 있는 절실한 이들을 만나리란 기대가 컸습니다. 또한 23년 전 작가가 작품에 드러낸 문제의식은 현재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했습니다.
“내가 아서에 대해 감상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몹시 감상적이고 살짝 잔인했다. (...) 그 관계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가 결코 진짜로 함께할 수는 없다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주요 설정이 제 취향(?)에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습니다. 기록을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니 ‘일기장’이 등장하자마자 심하게 두근거립니다. 1980년대를 사는 1900년생 동성애자 귀족과 1958년생 동성애자 귀족의 삶이 글을 통해 마주합니다. 귀족이고 최고의 교육 기회를 누렸지만 차별과 억압은 상상 초월입니다. 다큐인지 르포인지 잠시 말문이 막히게 하는 생생한 기록들은 과거의 일을 짐작한 것만은 아니란 통증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눈길이 마주쳤고, 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는 잠시 동안 응시하다가 특유의 웃음기 없는 은밀한 태도로 몸을 돌려 나갔다. 내가 일어나 앉자 주먹 하나가 심장을 쥐어짜 내 안에 있던 아주 작은 플라스크에 금을 내고 그것을 사랑으로 채워준 것 같았다.”
시인이기도 한 작가가 젊은 시절 만들어낸 이 세계의 풍경과 인물들의 심리는 읽을 수 있는 시가 별로 없어 우울한 나에게도 시적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영어로 읽어야 했을까요. 시란 모국어로 밖에 찬란하게 제 빛을 빛내지 못하니까요.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만나 가장 내밀하고 아픈 삶을 통째로 알게 되고 상대의 전기까지 부탁받은 상황, 자신의 전기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요.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할, 후대가 읽어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시도할 만한 것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해봅니다. 1900 찰스가 1958 윌리엄에게 전기를 써 달라 부탁한 일을 두고 친구 제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 사람 목숨을 구했잖아. 이제 다시 한 번 그래주길 바라는 거라고.”
마음이 묵직해집니다. 간단하게 정리될 이유가 아닌 듯도 합니다. 없는 듯, 죽은 듯, 부정당하며 살아 사라져가던 존재로서의 세월을 걷어 내고 글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살려내 달라는 그런 부탁인가 합니다.그래서 가감 없이 기록한 일기를.
“나는 아직도 한달에 한번쯤 꿈에서 그때의 그 탈의실을, 널빤지를 깐 마루와 벤치들을 본다. 우리는 고풍스러운 속어로 그것을 수영장 도서관이라 불렀고, 더 줄여서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제목이 궁금했는데 200페이지가 넘어가서 이유가 나온 듯 했습니다. 이것 역시 영어 원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드는 구절입니다. 번역문으로서는 어째서 ‘고풍스러운 속어’ 표현인지 짐작이 어렵기만 합니다. 새삼스럽게 영국 영어와 문학에 접근하고픈, 푹 빠져 머무르고픈 욕구가 맹렬해집니다. 이토록 불성실한 저라도 무척 좋아한 언어이고 문학이었던 기억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 책 곳곳에 드러나 뽐내는 유럽의 건축, 음악, 미술, 문학 등 작가의 예술적 지식의 함량은 가늠이 안 됩니다. 부럽고 시샘이 나는데 심취하고 배우고 싶은 욕망이 화라락. 이상한 부작용입니다.
“남자들끼리도 공공연히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걸을 남자가 있었으면 했다.”
이 문장이 슬픕니다. 어째서 사랑하는 이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일조차 혐오의 대상이 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요. 저는 심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동서고금의 완고한 거부들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회화가 덜 돼서 이 모양인가요 - 예전에 이런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기억이 납니다.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해하지만 저는 결국에는 무엇도 혐오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좋아요나 공감이나 박수를 보내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고 이해는 합니다. 21세기인데... 여전히 혹은 더 가시적으로 국적이 다르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성별이 다르다고 연령이 다르다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타인에게 -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 단죄하듯 처벌하듯 폭력을 가하는 장면이 참을 수 없이 역겹고 끔찍합니다. 저보다 약자에게만 발휘되는 비열하고 비겁한 증오와 혐오와 폭력성이 구역질납니다.
“그가 ‘숙청’이라고 부른 이 일, 남성의 악행을 박멸하려는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감이 되었던 사람이니까.”
마치 추리소설처럼도 전개되는 내용에서 저는 추리를 하는 짜릿함보다 예의 고달픔, 어려움, 두려움, 폭력을 읽습니다. 엄청나게 고생하고 힘들었겠지요. 귀족이라 해도.
“아무도 내게 말해줄 수 없었던 그 한가지 말할 수 없는 일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사적인 것이란 정치적인 것이다 Personal is political.” 이란 문장을 고스란히 설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을 따라 다녔을 뿐인데 각자의 시대를 경험한 느낌이 가득합니다. 박완서 선생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고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눈치도 못 채게 한국근대사를 느끼게 해주셨던 분이었지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문제적(?) 소설, 저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영어책으로 읽어봐야겠습니다.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