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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 크리 ㅣ 오늘의 청소년 문학 31
일요 지음 / 다른 / 2021년 4월
평점 :
역사 속에서 기개가 남달랐던 여성들을 그림도 사진도 없는 상태에서 복원한 작품들을 보면 서양 중세 시대 성경 그림과 다를 바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적인 이미지와 구현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기정사실화되어 대상 인물의 연령과 신분에 관계없이 후덕한 중년 양반가 여인이 되고 만다.
뜬금없이 초상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표지의 주인공의 모습과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이다. 신간임이 분명한데 아주 오래 믿어온 가치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혔다. 거짓은 드러나고 진실은 밝혀지고 노력은 보상받고 자유는 확대되는 것이 인류가 진보하는 방향이라고 올곧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거대담론을 내다버리자는 거대담론들에 지치고 일상에 소모되어 오래 잊고 지냈던, 크리의 나이였던 나 역시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의심할 바 없이 믿었던 주제이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나를 실현시키고 그 길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일로 수렴된다는 가치가 유의미하게 해석되던 시절이었다.
일요일에 태어나 고요하고 느긋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소개한 작가는 온전히 이율배반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예민하고 판단력이 뛰어나고 행동력도 남다르고 초능력까지 갖춘 매우 열심히 노력하는 주인공이다. 느긋하게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곤 하나도 없다. 차별, 혐오, 폭력은 그 무엇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각자도생은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부조리는 깨부수고 출발은 평등해야 한다고 말한다.
추억에 반응하듯 마음이 간질거리고 생각은 복잡해졌다. 거침없이 현실을 끌어다 쓰고 정면 돌파를 권하는 작가 덕분에 능력도 없이 문화 비평가의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쓸데없이 진지한 읽기 태도에도 다행히 재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 상황은 작금의 현실과 동일한 설정이나 이 바이러스는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질병으로 분류되는 기능을 한다. 이야기 세계의 인간은 건강체와 잠복체로 구분되고 그러한 분류는 바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 수직으로 곧게 선 타워에 삶의 공간을 만들어 운용하는 인류 문명, 그 자체로 계급적인 107층 타워 건물의 지하 17층에서 태어난 아이가 공고한 이 세계를 균열 낼 주인공 크리이다.
“분리정책이 우리를 지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켜요. 생명을 지켜요. 태양은 잠복체를 죽여요.”
일견 간단명료한 분류일 것만 같은 체계가 진실로는 더 복잡하고 비밀이 많고 온갖 사정으로 오염되었다는 점은 현실의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조바심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의 의제들은 정확한 공식을 사용하면 매끈한 정답을 주는 문제풀이처럼 해결된 바가 없고,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력들 또한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냥 통찰력이 멋진 문학 작품으로 읽고 싶은데, 멈칫거리는 구절들은 참 많기도 하다. 작가는 인류 문명의 면면과 이미 경험한 역사도 끌어들여 반성하고 바꾸자고 끈기 있게 글을 이어간다.
불안과 불신이 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나이라 맞는 말에도 불편하고 힘겨워하는 독자가 되었다. 예의를 지키느라 세 문단을 읽어도 결국 하려는 말을 돌리고 마는 어른들의 문학과 달리 짧은 문장들에 직구를 던져 놓은 청소년 문학을 가끔 만난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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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느 누구라도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 (...) 주변을 둘러 보라."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의 태도는 분노할 수 있는 힘,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윤리, 정의, 지속 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비폭력'을 택하여 평화적 봉기를 하며 분노하라."
: 부디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