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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추리스릴러 소설이자 그 이상 - 장르 성격 상 줄거리는 모두 생략합니다. 무척 멋진 작품이니 읽으시기 전 세상의 스포일러는 모조리 잘 피하시길 바랍니다 .
4장으로 구성된 목차에는 4명의 이름이 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일종의 가이드이기도 하다. 4명 모두의 심리와 서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다시 연결 짓다 보면, 인간들 사이에 오고 가는 거짓말과 오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특정한 누군가의 삶이 그 위력을 마주치면 평온한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부서지는지 냉정할 정도로 말끔하게 그려내고 있다.
괴롭다. 나이 탓이래도 좋고 뭐라 해도 좋고…… 삶이 무너지고 뒤틀리고 휘둘리게 만드는 인력들이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읽겠다는 계획을 지킬 만큼 가독성이 굉장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맺은 인연들에는 우연이 항상 개입한다. 이웃이 되었을 뿐인데 삶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그 과정에 실종되고 죽고 수감되고 병들고 구성원들 각자가 끔찍한 타격을 받는다.
이 모든 괴로운 과정을 거쳐도 끝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는 진실은 25년 전 그대로 남아 버렸다. 모두가 진실부터 밝히자고 하기엔 각자의 신념과 인내심이 다 다르다. 결국 진실은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만 정리되었다.
“타인의 기억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없다. 그것은 진실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다.”
“자기에겐 숨겨진 뭔가가 있어. 드러나지 않는 재능인지 감춰둔 비밀인지 몰라도 난 그걸 끄집어낼 거야. 안되면 배를 갈라서라도 말이야.”
그 중 일부는 진실에 가까워 보이는 오해와 착각이었고, 진실 대신 오도된 것들을 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또 다른 헛된 복수가 시작된다. 끝없는 고통, 이 이어진다. 마치 진실이란 게 이토록 불길하고 부정한 일들을 끌어 들이는 것처럼.
“진실에 가까운 건 진실이 아니에요. 독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우물물 전체가 독약이 되는 거예요.”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드러난 것은 가족과 이웃의 모습들이다. 사랑보다 야망이 우선인, 다정하기만 하고 의지할 수 없는, 두려워서 서둘러 거짓말로 진실을 봉인한, 감춰지지 않은 욕망과 질투와 죄책감과 그리고 분명 사랑. 이 모든 요인들이 생물인 듯 얽혀 들자 진실을 기억하는 일보단 망각이 쉬워졌다.
“그들은 가난하고 똑똑한 애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아요. 반체제활동가나 노조위원장이나 지능범죄자 같은 우환거리가 되기 전에 자기들 발밑으로 기어들게 만들겠죠. 먹이를 던져주며 사나운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요. 난 고분고분한 척 부자들이 주는 미끼를 받아먹을 거예요.”
결말은 지극히 슬프다. 한 가지 불행이 발생하면 위로하고 도우려는 방식이 먼저 오지 않고 공포와 적의와 회피하고 싶은 마음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도착한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식은 유구한 역사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 더구나 때로는 다수가 그런 입장이기도 하다.
매번 정확히 바로 잡는 노력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그런 노력이 있다고 해도 대대적으로 성공하지도 않으니, 고통을 빨리 덜고 도망치는 방법이 영리한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렇게 감춰진 진실로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오래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서로 상처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래 덮어둔 침묵의 내부에서 자라난 거짓이 그들을 파멸시키려 들고 있었다.”
이야기 속의 어린 소녀가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한편 그를 살아남게 만든 이유와 동력이 무엇이었을까를 낱낱이 알고 나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거짓에 기반을 둔 모든 감정과 노력과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상처는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나이테였다. 그녀의 영혼이 그려낸 무늬였고 그녀의 상처를 그리며 그는 자신의 고통 달랠 것이고 그 그림은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독자로서 추리나 미스터리 작품이 반가운 이유는 기분 좋은 과정의 긴장과 결말의 후련함 혹은 충격적일 지라도 시원한 마무리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읽고 간만에 무척 맛있게 먹은 음식이 꼼짝없이 체한 기분이 들었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을 흔드는 여운이 깊고 긴 작품은 한참을 아프다.
예언처럼 우연처럼 20년도 더 전에 친구와 재미삼아 나눈 문장 - What is done can not be undone. What is undone can not be done. - 이 이 책의 대화로 떠올랐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