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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ㅣ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평점 :
우연인지 그 또한 선택인지 4월에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두 권 읽었다. 수용소에 갇혔다 구출된 이야기에 안도하고, 해방군 소련군에 의해 스파이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고 15년 형을 받은 이야기에 숨이 막혔다.
정직하게 회고해보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명을 살상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은 그리 오래 된 역사가 아니어서 그로 인해 찾아보고 배울 마음이 쉽사리 들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동종 인간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끔찍하고 두려웠다. 표정 없는 숫자마저 무거운 희생자들의 피가 흐르는 역사가 너무 뜨거웠다.
나는 읽고 싶지 않았던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에 드러난 인간의 모습과 기억해야할 역사에 압도당한 친구의 집요한 추천으로 <피에 젖은 땅>을 20일부터 함께 읽었다. 800쪽이 넘는 분량은 어느 한 쪽도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학자의 단단한 결단과 필사의 연구 결과들로 빼곡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겁던 시절에 대한, 짐작보다 더욱 적나라하고 충격적인 야만성과 무참한 슬픔에, 피는 땅을 적시다 급류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참상을 느꼈다. 구역질나게 충격적인 스탈린의 자국민 살해 상황에 대해서도 까맣게 몰랐던 지라 이 책을 통해 상세히 목격하고 정확히 배웠다.
“미국와 영국 입장에서는 카틴 대학살에 대한 소련의 거짓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 스탈린을 설득하기보다는 폴란드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거짓, 즉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받아들여 주길 바랐다. 아울러 폴란드가 주권이 있는 정부라면 결단코 취할 수 없는 조치, 즉 자국 영토의 절반인 동부를 소련에 넘겨주길 원했다.”
피에 젖은 땅, 블러드랜드bloodland는 폴란드 중부,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연안국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멍청한 정책실패로 대기근이 발발했고, 강제이주, 대숙청, 대공포로 권력이 발광하면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강제된 끝없는 굶주림은 우크라이나에서 부모가 자식의 인육을 먹도록 만들었다. 히틀러가 역겨운 환상 속에서 스스로 설계한 천국을 위해 타민족을 살해했다면 스탈린은 경제발전을 위한다는 거짓 명목 하에 자국민을 살해했다.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는 가족이 가장 약한 식구를 잡아먹었다. 보통 어린애들이었다. 중략. 착한 사람부터 먼저 죽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몸을 파는 일을 끝내 하지 않은 사람들. 시체 뜯어 먹기를 못내 거부한 사람들도 죽어갔다.”
정갈하고 깊이 있는 연구 결과를 읽으면서 이유가 되는 감정이 무엇이든 눈물을 참기가 힘이 들었다. 방금 전 읽은 문장들로 눈이 흐려지고 나면 이전에 읽은 문장들은 정말로 그 뜻 그대로 일까 믿을 수 없어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왔던 일대기가 비참하다. 책을 붙잡고 흘리는 눈물이 언젠가 가 닿을 지도 모르는 먼 나라의 장면들마다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이들이 있었다.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단지 추정치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일부는 우리의 정밀한 추계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 이 숫자들을 찾고, 이를 통해 일정한 전망을 내놓는 작업이 절실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단지 우리의 세상을 마구 뜯어 고쳤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마저 개조했다는 뜻이 되리라.”
이런 일들을 겪고도 인간은 살아남고 또 기록했다. 피투성이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흑백의 장면들을 보고 싶지 않아 읽고 기억하는 간단한 일을 외면하고 유예한 시간이 아팠다. 오늘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내일에는 희망이, 자유가, 해방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또 믿은 이들이 있었다. 몸이 살아남은 이들의 부서진 마음은 속도를 맞춰 회복되었을까, 거듭되는 악몽처럼 그 시절의 지옥에 사로잡혀 있을까. 상처가 트라우마가 자신을 유일한 죄수로 가두는 독방의 벽을 쌓아 올리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여행자로 지나간 낯선 땅이자 친구를 만들지 못한 곳에서 살다 살해된 이들의 고통과 죽음에 어째서 공감할 수 있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통증을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으로 종의 가치를 변별하고,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생물의 통증과 고통을 부정하는, 고통을 종의 필연과 보편의 기준으로 삼는 존재가 인간이라, 나는 아직 인간이구나 안심하고 또 서럽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일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울음소리를 조용히 삼켜가며 읽는 내게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은 피에 젖은 어두운 땅 속으로부터 또렷한 목소리로 끝까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맞고 채이고 짓뭉개지고 베어지고 찢겨지고 잡아 먹혀서 피로 녹아 땅 밑에 잠겨든 이들을 끄집어내며 저자는 어떤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 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살해한 후 목소리마저 빼앗아 조용히 잊히기를 기다리던 당대의 권력을 이어받은 현재의 권력에게 저자는 책임과 정의와 복수의 목소리를 높이자고 하지 않는다. 손쉬운 이 방법이 제시되면 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골라 참여하고 방향을 틀어 탈출하려던 나는 그래서 난처하다.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은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 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저자가 정교하고 상세하게 먼저 들여다보고 들춰낸 진짜 기록들 - 학살자들의 문서 기록과 희생자들의 일기와 편지, 생존자들의 증언들 -을 읽으며 나는 어지럽고 울렁거려서 그만 읽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모두다 인간이 만든 역사인데 인간적인 감동은 전무하다. 인간이 인간을 취급할 수 있는 최악의 역겹고 끔찍한 방식만이 또렷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는 점 정도는 유익하달 수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극우와 극좌의 합작품으로서의 학살이 어떤 모습의 비극인지를 확실히 배우게 된다. 방대한 자료 분석과 종합적 보고를 읽어 낼 수만 있다면 전모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 해 봄 하루에 1만 명 이상씩 사망했다.” “연못의 낚시를 하다 학급 친구의 잘린 머리를 건졌다. 중략. 이런 일은 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드물지 않았다.” “인육을 파는 블랙마켓이 열렸다.” “나를 죽이려고 칼을 갈던 아빠의 모습(생존한 여섯 살짜리 소녀).” “엄마가 자신을 먹도록 아이에게 강권하였다.” “사방에 거적때기나 담요를 덮어쓴 소년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자기 배설물을 먹으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완곡한 것들로 골라 적어 본다. 저자가 어째서 흔들림 없이 극사실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참상을 전하는 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히틀러는 스탈린으로부터 힌트를 얻고 스탈린과 각축을 벌이면서 살인 기계가 됐다.” 이런 ‘신성한’ 동맹을 통한 독.소의 합동 작전은 재앙으로 확대되고 지상의 ‘에덴동산’ 건설을 위해 필요한 목숨은 이곳에서 1,000만, 레닌그라드의 사람들을 폭격으로 또 굶겨서 죽여 나머지 400만을 채웠다.
“한 생존자는 농민이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은 죽고, 죽고, 또 죽었다”고 회상했다. 죽음은 느리고, 굴욕적이며, 넘쳐흐르고, 흔해빠진 일이었다. 페트로 벨디는 죽음을 예감한 날 안간힘을 써서 고향 마을을 기어 다녔다. 다른 마을 주민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자신을 매장하러 묘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낯선 이들이 자신의 몸을 구덩이까지 끌고 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 미리 파두었지만, 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시체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운이 좋아 평화로운 세상의 기억이 더 많은 내게 폴란드는 쇼팽의 나라였다. 쇼팽의 심장이 잠들어 있다는 성 십자가 교회(Holy cross church/Kościół św. Krzyża)는 성스러웠고, 그 심장을 한 때 가져갔다는 히틀러는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더없이 역겨웠다. 바로 옆에 작은 공간으로 기록된 <Katyn 1940년>이 소련이 카틴 숲에서 자행한 학살을 추모하는 곳이라는 것을 듣고도 수많은 비극과 폭력의 기록이라고 무심히 이해하고 끄덕였다.
이 책을 읽으며 찾아본 자료들에는 폴란드의 희망과 미래를 모조리 망치려고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골라 학살한 사건의 전모가 있었다. 추모를 위해 이곳으로 향하던 폴란드 대통령 내외와 동승자들 97명이 러시아 변방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모두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보도도 만났다. 안온한 추모가 가능한 시절은 오지 않은 비극이 핏빛으로 어두운 곳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대학살 역시 완벽하게 과문해서 편안한 시절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를 울렸던 비명과 적셨던 피를 떠올리지 않고 이 나라를 다시 볼 수는 없다. 저자가 글 속에서 죽어간 우크라이나 소년의 이름을 부를 때 또 다시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이오시프 소볼레프스키! 어머니, 다섯 형제와 함께 아사했다. 여동생 한나만이 살아남아 과거를 증언한다.
표정 없는 숫자를 하나씩 떼어 이름마저 피에 젖어 잠긴 이들의 이름을 낱낱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저자는 우리는 현장으로 초대한다. 역사란 재미있고 흥미롭고 배울 점이 가득한 옛 이야기만이 아니라고. 연속성을 잃는 법이 없는 역사를 몸이 덜덜 떨리고 마음에 통증이 번지는 현장으로 경험해보라는 초청이다.
살해된 이들의 피로 젖어든 땅들은 여전히 마르지 못했을 것이다. 땅을 적시다 넘쳐흐른 피는 세상의 모든 곳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명을 마시고 피를 맛보며 살아왔을 것이다. “모든 삶은 이름을 갖는다.” 죽음이 아니라 빼앗기기 전 그들에게 삶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 어울리는 이름을 내가 가진 인간의 온기로 불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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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간 읽으며 필사한 내용이 20쪽이 넘었다. 사이사이 넘쳐 난 감정들만이 조각난 문장들에 담겨 이어지지 않는 감상으로 남아 있었다. 저자의 바람대로 오롯이 정리할 수는 없어 한 순간 쓰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기억을 도울 것이라 믿어 뭐라도 두서 없이 써둔다.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