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이는 화학 -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과 14가지 독약 이야기
캐스린 하쿠프 지음, 이은영 옮김 / 생각의힘 / 2016년 12월
평점 :
두 번째로 소개하는 캐스린 하쿠프의 책, 이번엔 저자의 전공인 화학입니다. 화학 개론서가 아니라 애거서 크리스티가 살인도구로 사용한 독약들과 관련된 화학이야기입니다. 원제 - A is for Arsenic - 를 보고 즉각적인 전율이 흘렀습니다. 연쇄살인마가 알파벳 노래처럼 부를 듯 섬뜩 끔찍한 느낌입니다.
CSI의 독극물분석팀의 일원이 된 기분을 느끼며, 왜? 라는 의문을 매번 품기도 전에 정신없이 막 따라 읽었습니다. 독약은 14개, 살인마도 14명, 인체 내 반응 분석, 실제 독살 사건 일화! 그리고 TMI가 아닐까 중간에 잠시 제정신이 들기도 한 독약들의 입수, 주입, 검출 방법들이 담겨 있습니다.*
* 부록2 독약과 화학 물질의 구조. 이것은 논문의 별첨 자료가 아닌가 합니다. 멋지십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가는 자신이 알고 있던 화학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신나게 작품들에 활용했다고 합니다. 20세기 한 때 화학을 불성실하게 부전공한 독자로서 있는 힘을 다해 이해하(려 노력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학자가 분석하고 정리해준 내용이라 그런지 엄청 재밌고 다 말이 되는 듯해서, 중간 중간 마구 달아오른 흥분과 몰입에 당황하며 나는 독약을 사용하는 살인마가 아님을 자꾸 상기해야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재밌는 추리미스터리 작가로만 알아온 저자 - '범죄의 여왕' 데임 애거서 메리 클래리사 크리스티Agatha Mary Clarissa Christie(1890~1976)의 현실 위엄을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젊은 날 제가 단편의 휴가지 설정이 어떠니 저떠니, 했던 그런 불경한 말 따위 못 들으셨을 거라 믿습니다.
잘 몰라서 다 알아차리지 못한 작품의 매력을 이 책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특히 애용한(?)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는 무려 10편의 장편과 4편의 단편에 등장했고, 희생자는 총 17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청산가리를 막 먹여서 죽인 건 아니고, 직접 주입하기도 하고, 술이나 후자극제(smelling salts), 담배에도 탔다고 하네요. 이 책에서 아주 자세하고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는 비중이 큰 독약이고 모든 내용이 흥미진진 재미있습니만, 한 가지, 청산가리 공급원을 애거서 크리스티가 매우 정확하게 작품에 묘사한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왜......
청산가리로 최초 살해되는 로즈메리가 등장해서 마음이 짠한 표지도 좋고,
치명적 능력을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 없다는 듯
봐라~! 하고 그려준 노골적인 표지도 대단합니다.
빛나는 청산가리Sparkling Cyanide는 오디오북으로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오디오북을 들으며 이 글을 쓰니 기분이...... 오묘하게 좋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12
토요일 오후 짧은 외출에서 무척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20대 초반 정도로 짐작되는 청년이 건물에 기대서서 마스크를 내리고 휴대폰 화면을 스크롤하며 연초담배를 피고 있었습니다. 흡연 장면을 굉장히 오랜만에 본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20대일 때는 실내에 담배연기 자욱한 것이 일상인 시절이었습니다.
빛나는 젊음과 건강이 아까운 마음이 스쳐갔지만, 이 따위 세상 - 공기, 물, 땅 골고루 오염에 코로나 판데믹 등등 -을 물려준 기성세대로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미래 따위 모르겠다, 막 살아보자~ 한 적은 없어 억울한 면이 없지도 않지만, 누가 더 억울한지 정확히 따져보자면 풍요와 희망과 꿈과 기대 등등을 길게 누려본 적 없이 이런 현실을 맞은 젊은이들이 훨씬 더하겠지요. 그들의 미래를 우리가 모두 당겨쓴 것이 부디 아니었으면 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니코틴nicotine을 살인도구로 사용하는 작품은 3막의 비극Three Act Tagedy이 유일합니다. 작품 속 희생자는 세 명이었지만, 작금의 현실에서는 매년 수천 명이 흡연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캐스린 하쿠프 저자가 정리했듯이 니코틴은 중독을 유발할 뿐이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다른 화합물들입니다. 담배에 포함된 화합물들의 종류가 발표되었을 때 어떤 흡연가는 가격 대비 그렇게 많은 물질을 넣어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는 웃픈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중언부언으로 책 소개는 부족한데 분량만 긴 글입니다. 어차피 다 소개는 무리! 마음을 편히 하고 마지막으로 누군가는 혹시 재미있을 지도 모를 ‘독’과 관련된 제 일화를 소개합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마침 초청 교수들도 함께하는 금요일이라 매주하는 스와레soirée, 작은 파티를 조금 크게 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멋진 케익도 구웠습니다(제가 아니라 파티셰 (patissier)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누군가가 케익 주위로 독성아이비poison ivy 잎 장식을 했습니다. 잎 모양이 예뻐 보였나요?
다들 각자의 알코올을 즐기며 환하게 웃으며 왁자하게 얘기를 나누는 중이라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잘라서 주면 잘 보지도 않고 그냥 먹었을 지도 모릅니다. 케익이 남는 일은 거의 없으니 그날도 분명 대부분이 먹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연히 다른 음식을 보러가던 학교 직원이 케익을 발견하고 바로 서빙을 중단시켰습니다. 놀라긴 했지만 파티에 재미를 더하는 정도의 일로 생각하고 심각성을 몰라 누가 한 짓이냐고 호탕하게 웃으며 넘어갔는데……, 월요일 아침 교직원 학생 전체 회의 참가를 요청 받았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확실한 영국인들이 감정을 표정으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장은 말 그대로 창백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막 흥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이슈가 될 수 있었던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차분한 충격과 분노를 담아 우아하게 얘기하시더군요.
식물학, 생물학, 화학, 생태학 등등 다 더하면 학위가 수십 개는 될 전공자들과 저명한 교수들까지 포함한 모임에서 독성 아이비조차 구분하지 못해 자발적으로 섭취한 뒤 중독 증상이 보고되었다면…… 일단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을 거라고. 기사 제목은 아마: 보라! 독성 아이비도 구분 못하는 멍청한 OOOO 대학의 학생들과 교수들을! 이들은 무엇을 연구하고 있나!
회복 불가능한 오명으로 학과와 학교의 명성이 처절하게 망가지고 연구 지원 후원 자금 다 끊기고 모두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량해고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고.
아무런 피해가 없어서 그래도 대부분은 웃고 말았지만, <죽이는 화학>을 읽으며 애거서 크리스티를 다시 만나고 독살 이야기를 계속 읽다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아이비 장식을 한, 아무도 찾아내려 하지 않았던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널리 알려진 독성 식물인데 어째서 그런 불필요한 장식을 정성스럽게 꼭 해야 했을까요? 실수가 아니라 의도가 있었을까요? 왜 아무도 누군가가 케익을 장식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