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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진스키 - 인간을 넘어선 무용 ㅣ 현대 예술의 거장
리처드 버클 지음, 이희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3월
평점 :
누군가가 니진스키에게 점프할 때 당신처럼 공중에 머무르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니진스키가 그 질문을 못 알아들었지만 곧 매우 친절하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냥 높이 뛰고서 그 위에서 잠깐만 멈추면 됩니다”라고 했다.
구태여 확인하진 않았지만 3,000쪽이 넘었던 <레 미제라블>을 제외하고 드문 분량의 책 - 1,128 쪽 - 을 간만에 만났다. 아침에 50쪽 씩 20일 혹은 하루에 100쪽씩 열흘로 대략의 계획을 잡아 읽어 나갔다. 다 읽었다아~ 한번은 외쳐보고 싶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발레 예술을 다루니 당연히 음악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어 있고 예술가의 전기와 당시 역사에 대한 이야기 역시 풍부하게 담겨 있다. 전문지식을 반드시 갖춰야만 읽을 수 있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마냥 술술 읽히지도 않았다. 읽다 보면 여기저기 찾아보고 싶은 내용들이 나오고, 이름과 지명과 사건들이 흐려지기도 했다. 발레도 음악도 역사도 전공으로 삼지 않은 독자라 어떤 감상이 남을지 스스로도 궁금하였다.
이름은 낯설지 않았던 니진스키와 더불어 과문해서 생애도 업적도 중요성도 몰랐던 댜길레프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Дя́гилев, Sergei Pavlovich Dyagilev를 새로 만났다. 그 두 인물이 만나고 함께 펼쳐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니진스키가 ‘보조’가 아닌 발레리노로서 독립적인 실력과 가치를 인정받는 과정을 몰입해서 읽고,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탁월한 비상과 표현력을 펼친 공연들의 면면들을 접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우리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부족한 요소가 한 가지 있었다. 우리는 투쟁하는 능력과 힘들고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는 정신이 부족했다. 댜길레프는 소위 의지력이라고 부르는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녔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댜길레프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 사람을 이끌고 조종하는데 강력한 능력을 지닌 이 남자는 창조적인 예술가들을 그의 전제적인 지휘봉 아래에 두고 예술가들을 순종적인 공연자들로 만들어 자신들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도록 했다.
<Sheherazade. Nijinsky. 1910>
https://www.youtube.com/watch?v=8tmh7wwf2s8&list=PL4617EC62160E073C&index=6
러시아발레와 음악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 큰 그림으로 이해하면서 러시아 예술이 어떻게 융합해 나가는지 현장 기록을 관람한 기분을 느꼈다. 짙고 깊고 화려하고 메시지가 뚜렷한 무척 황홀한 예술의 성장을 지켜 본 소중한 경험처럼 느껴져서 무척 애착이 생기기도 했다.
다행히(?) 1월에 을유문화사의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 400쪽 밖에 안 되는 작은 책 -을 감동과 열의를 표하며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등장하니 일종의 안심(?)이 되면서 반가웠다. 5분간의 영상을 두 번째 보면서 저토록 격렬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의 감성이 아유와 소란을 받은 것이, 결국 안무가(choreographer)로 그 재능을 더 오래 더 널리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아팠다.
https://www.youtube.com/watch?v=4coES_ei4PU
https://blog.naver.com/opazizi/221849028009
제가 아는 우주 최고의 <스트라빈스키> <니진스키> 관련 포스팅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힘내어 완독하시길 힘껏 응원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로슈카Петрушка, Petrouchka>와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의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 Afternoon of a Faun>* 공연들도 찾아보면서 ‘삐에르’로 분장한 니진스키의 춤보다 발레극 연출이 위화감이 전혀 없이 ‘현대적’이라 너무나 놀랐다. 무려 1913년 공연이다. 이 때 이미 고전 발레의 형식을 파괴했다고 평가되는 안무를 니진스키 본인이 기획했으나 선정성 논란으로 예술적 빛이 흐려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EvVKWapctX4(38:01)
* 목신의 오후: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장편시를 바탕으로 니진스키가 안무한 발레. 니진스키 자신의 작풍을 확립하고 20세기 오케스트라 작품의 방향을 결정했다.
번역서에 대해 두려움과 흡사한 불안을 내재한 독자로서 처음에는 언제 읽기에 불협화음이 들릴까 안절부절못했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그런 염려를 잊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영국의 발레 비평가이자 저자인 리처드 버클의 바슬라프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과 박학다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지식에 감탄과 감사를 표한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공부하고, 10년은 춤추고, 30년 동안 빛을 잃어갔다.”란 한 문장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음에 스며들었다.
유명한 무용수였지만 가족을 버린 아버지, 정신 질환을 앓던 형, 생존을 위해 온갖 굴욕을 감당해야했던 어머니를 가진 니진스키가 아홉 살에 황실 발레 학교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후의 어둠에 의해 더 빛나는 삶의 시작이라 아플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는 작품에서도 인생에서도 높이 날아올랐다.
예술에 대한 끝을 모르는 사랑과 연구와 재능으로 낯설고 우아하고 기적처럼 환상적인 한 분야의 예술 영역 자체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톨스토이를 사랑했던 천재, 특별한 존재의 힘과 매력은 치명적이었고 세상의 갈채와 환호는 드높았다.
빛나는 비상의 시기는 어찌나 순식간인지 1919년 니진스키는 자신이 가지고 속한 육체와 예술의 영역에 대한 불안으로 조현병 진단을 받는다. 앞으로의 기나긴, 어둡고 쓸쓸하고 서글픈 그의 추락을 어떻게 지켜봐야 하는지 남은 분량이 두려웠다.
현대 발레가 태동하던 시기의 유럽의 예술의 풍경을 저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풍부하고 방대하게, 맘 편히 신뢰하며 상상하며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가 담아 낸 그 풍경 속에서 20세기 발레의 새 지평을 열고 사그라진, 자그마하고 섬세한 비운의 천재 예술가, 무용가, 춤꾼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늘어갈수록 안타까운 기분에 여러 질문들이 머릿속에 헝클어진다. 저자가 밝히지 않은 합당한 이유들이 있으리라 마음을 달래본다. 영국의 학자는 확신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법(?)이다.
스크라빈스키, 차이콥프스키에 이어 올 해 세 번째 만나는 러시아 예술가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의 여흥으로 덧붙이자면, 마린스키 발레단Mariinsky Ballet Company의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보는 놀라움과 재미도 대단하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장 콕토Jean Cocteau, 생상스Camille Saint Saens, 라벨Maurice Joseph Ravel,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로댕Rene-François-Auguste Rodin. 내가 아는 이들인가 싶었는데 그들이 맞다.